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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한국불교학 53집 1.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력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먼저 한국 국내 정치에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1885년부터 서울에서 반일 운동이 일어났습니 다. 이에 일본은 중국에 보상을 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폭동에 중국군 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협상은 1885 년 톈진협정 체결로 일단락됨으로써 양국은 한국에서 일·중 군대의 철 병을 약속하였고, 한쪽이 다른 쪽에 미리 알리지 않은 상황에서 파병하 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추후에 한국의 부패정권을 상대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 부패정권은 중국정부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였습 니다. 그런데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두 강호는 각각의 군대를 철수시 키려 들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한국정치에 내정간섭을 거부한 이후 일본은 중국에 대하여 전 쟁을 선포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선에 최고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습 니다. 그러나 일본의 정책은 한국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으 며, 특히 명성황후는 일본의 내정간섭에 반대하고 일본의 음모를 모두 좌절시켰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는 궁에 난입한 일본군에 의해 공식적 으로 처형되는 비극적인 시해를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 본은 한국 내 일본 저항세력을 무력화시켰지만 결과적으로 한국민 전체 를 적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탐욕이 드 러났을 때는 한반도 전체가 북의 침략으로부터 한 사람인양 뭉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은 개입할 수 있는 호기였고, 한국은 ‘동아시아의 수호자’와 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