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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1870년에 이행우와 벽진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7세에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아들이 되어 한성부 남부 장동 장박골로 갔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고, 외국어나 산술에 능통하였다.
1904년에는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으나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태로와지자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항일민족교육을 하였다.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과 잔혹상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했으며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이상설은 귀국하지 않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여 한흥동에 한인마을을 건설하고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4년 연해주 한인 이주 50주년을 기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1915년에는 신한혁명단을 조직, 광무황제의 중국 망명을 추진하고 독일과 손잡고 일본과 싸울 것을 계획하던 중 탄로나 실패했다. 이에 병을 얻어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