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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통진면 목점리로 이주하여 15세에 4년연상인 부인 전주이씨와 결혼하였다. 공은 자소로 재능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하며 의협심이 탁월하였다. 22세부터 불고가사 유랑을 즐겨 자주 출입하였다. 국운이 쇠퇴하고 왜인의 국정간섭이 심해지자 각처에서 의병이 궐기하였다. 24세에 공은 분연이 일어나 정용대의병장 막하에 투입하여 군자금 모집책겸 소대장으로 통진 강화 교하 풍덕등으로 활약하였다. 가장 큰 전적으로는 강화도 어느포구에서 왜군 10여명이 목선으로 도강하는 것을 부대전원이 산기슭에 은신하였다가 일제 사격하여 전멸시킨 일이다. 당시 군자금모집에 응한 인사는 통진 김상은 금십원 교하 민영달 총2정과 탄환 100발 풍덕 김인의 금50원 연안읍 최성습외 1명 현미150입 이상은 공판정에서 공은 여러인사에 누가 될까바 이상만을 공술하고 이외에도 무수하다. 이상과 같이 활약하다가 강화고도충에서 왜병에게 체포되였으며 당시 공의 나이 25세 제1회 공판에서 교수형이 구형되자 공은 자리에서 벌떡 이러나 의자를 들어 판사석으로 던지며 격렴한 어조로 내가 할일을 하였는데 어떻게 교수형이냐고 항변하자 3개월간 구류하였다가 1910년 7월 15일 7년형의 선고를 받고 감형도 없이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자 다시 만주로 도피하여 구국활동을 하다가 1922년 1월 16일 북간도 국자가 관동여관에서 우국의 한을 품은채 장년 39세를 일기로 영원히 세상을 타계하였다. 의방 당시 가족상황을 기재않이 할수가 없다. 입대수월후 왜병이 야습하여 가택수색과 가족을 무수구타하여 공의 거처를 대라고 행패당하였다. 이 사이 8세 소아 공의 장남은 담구멍으로 도망하여 외가로 피신하였다. 이런일을 자주 당하자 부친 석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