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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에서 거사(擧事)한 을미의병사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왕후를 시해한 일제와 단발령에 항거한 을미의병활동의 효시가 될 거사가 이곳 지정면 안창역에서 일어났으니 1896년 1월 12일 (乙未年 11월 28일)이었다. 이 거사를 주도한 인물은 이웃 경기 양평 (지평군 양동면 석곡리 사람인 유생(儒生) 이춘영(李春永)과 포군(砲軍)대장 김백선(金伯善)이다. 한편, 의병모집 책임자인 소모장은 연안부원군 김제남의 10세손인 원주출신 진사 김사정(金思鼎)으로 안창리 의거에는 많은 원주사람과 지평에서 온 포군들 외에 충북 제천에 거주하던 유생들도 가담하였다. 의병들이 원주관아를 점령하니, 이는 춘천과 안동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어서 1월 17일 제천을 점령한 후 단양출신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춘영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제천을 거점으로 삼은 의병진은 1월 22일 단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후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포군들이 영남 지역으로 흩어지고 이필희는 지휘권을 이춘영에게 넘겼다. 이춘영은 영남지역에 내려갔던 포군들은 다시 수습하고, 제천과 원주 등지에서 모군을 모아온 안승우와 영월에서 합세한 후 의암 유인석을 호좌의병진대장(醐左義兵陣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영월에서 제천으로 진주한 의병은 주변 여러군을 장악하며 2월 17일 충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수안보전투에서 중군장 이춘영이 전사하고, 3월 5일 충주에서 퇴각하여 제천, 단양, 풍기, 음성 등을 거쳐 6월초 여주 강천에 도착하기까지 여러 곳을 편력하였다. 이후 원주 부론과 신림을 거쳐 제천으로 들어간 의병부대는 평창 방림에서 해산되었으며 의암 유인석 등 일부 유생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새로운 항쟁의 길을 모색함으로써 훗날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모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