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age


32page

일어날때 공도 분연히 일어섰다. 이리하여 공은 장기간 구류되고 퇴교되자 도일하여 산구중학을 거쳐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1938년에 졸업하고 귀국 후도 애국의 일념은 굽힐 수 없어 혹독한 왜정하에 향리에서 부모를 봉공하고 몽매한 민중 계도와 청소년의 선도 육영에 헌신하셨다. 동시에 당지 박형동 동지 등 70여 인을 규합하여 구국의 선봉에서 결사분투하다가 왜관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서로 이송 왜경의 가혹무도한 고문 끝에 구국의 한을 품고 영위옥쇄하니 때는 1939년 22일 27세의 피 끓는 젊음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병합함에 일시동인이라는 구실을 내세웠으나 박해의 도를 더함에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이 필사의 신념과 정열로 일어섰던 것이다. 그 뒤 공의 부인은 서애 선생의 후예인 풍산류씨로 부덕에 흠이 갈까 단신과고로 구고를 봉양하고 2남 2녀를 전심 훈육한바 남 못잖게 영달번행하니 이어찌 공의 충효근천의 여경이 아니리오.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계단 영고의 잇따른 침략을 거쳐 8년간의 말발굽에 초토화된 임진왜란 천추에 씻지 못할 굴욕의 병자호란 등 외침으로 난마가 된 이 땅에는 다시 당쟁과 동학란 등으로 왜군을 불러들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청로 등에게도 구원을 청하여 국모가 시해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회오리 바람속에 마침내는 왜의 식민지 노예가 되어 질곡의 40년을 몸부림치다가 선열의 가호와 생존 지사의 투쟁 및 우방의 도움으로 독립은 되었으나 국토가 양단된 바 선열의 뜻을 이어 받아 전민족이 합심하여 통일을 이룩하고 국력을 튼튼하여 다시는 외구가 발붙이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