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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그 뜻을 펼 자리가 없었다. 공은 성품이 관후하면서도 내면은 강직하여 오직 정의만을 지향하였다. 진주고 재학시부터 항일투쟁을 위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다가 징역 1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흠모하던 몽양 여운형의 지시로 유학생을 결집하여 일본의 패전을 촉진하였다. 몽양은 청양은 청년에 관한 문제는 전사옥이 제일 잘아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으며 공을 희세의 인재로 인정하였다. 1941년 귀국하여 청년을 규합하여 반일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에 몽양과 함께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그 익년 8월 2일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청년 노동자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반일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학병 징병 및 공출 등을 기피토록 권유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총독 소기국소(고이소 구니아키)가 고관직을 미끼로 광복운동 포기를 종용하였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945년 2월에 왜경에 체포되었으나 기지로 탈출하여 경기도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위장 은둔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29일 전국 청년단체 총동맹 의장에 선출되고 그 익일 서울시 연맹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어 청년운동을 지휘했다. 백범 김구 주석이 귀국하니 12월 2일 각계 청년대표 80명과 경교장에 찾아가서 공은 청년을 대표하여 환영사를 하였다. 그러나 혼란한 시국 속에서 1948년 8월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니 탄석을 금할 수가 없다. 배위는 선산 김씨며 달근의 따님으로 귀덕이 있었다. 공과 동경인데 1995년 을해 2월 18일 81세로 작고하였다. 묘소는 월전촌 서재 능축좌지원이다. 아들은 재일이고 딸은 미자로 파평 윤재목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준현이고 손녀는 은희이며 달성 배우순에게 출가하였다. 외손은 성근과 탁이다. 아아! 공은 유복한 환경에서 생장하였고 일본 유학까지 마쳤으니 얼마든지 안락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으나 왜적의 잔인한 폭압에 시달리는 동족을 차마 좌시할 수 없어 풍찬노숙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해 심혈을 경주하였다. 안정된 조국에서 그 경륜을 펼치지도 못하고 혼란 속에서 희생되고 말았으니 공 개인의 불운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손실이라 하겠다. 걸출한 광복운동가이면서도 그 용의한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소윤 재일 장이 안타깝게 여겨 다년간 성력을 기울여 자료를 모아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였으나 아직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공의 영령의 안식지소를 마련코자 하여 덕배의 봉분 곁에 영단을 설치하고 공의 행적을 각재한 비건립을 도모하여 공의 가장과 자료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