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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류중권 선생은 본관이 고흥이니 도첨의 정승고흥부원군 충정공택의 17세손이요. 흥성부원군의 정공몽표의 10세손이시다. 1863년 11월 12일 천원군 병천면 용두리에서 선비 윤기남의 맏아들로 태어나셨다. 자질이 총명하고 강개하시어 글을 읽다가 옛사람의 절의를 세운 곳에 이르면 문듯 책을 덮고 개탄하시였다. 선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을 보시고 크게 분개하시어 교회를 세우시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길러주시던 중 1910년 국치를 당하자 더욱 통분함을 참지 못하시어 온 가산을 기우려 홍호학교를 세워 영재들을 교육하여 광복을 꾀하시다가 왜경의 탄압으로 폐교당하였다. 이에 더욱 분개하시여 정공산 송춘계류 장렬한 훈등동지를 규합하여 광복운동에 헌신하시다가 1919년 자주독립운동을 위하여 아들 관옥 딸 관순 아우 중무 조카딸애더 종세 중오 종숙 도기의 온가족과 조민원 김구응 김상훈 등 동지들과 대한독립결사대를 조직하고 칠안 청주 연기 진천 안성 등지를 동원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 집결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진두에서 군중을 지휘하시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병천 헌병분견소를 탈취하여 소장 소산을 묶어놓고 호령하시는데 별안간 천안헌병대 수십명이 급습하여 마침내 총살당하시니 향년이 57세이시다. 부인 이소재 여사가 이 광경을 보고 와락 달려들어 왜장의 멱살을 잡고 싸우다가 또한 총살되고 관순은 체포되여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7년형을 받고 옥중에서도 투쟁하다가 피살되고 관옥은 공주만세사건에 주모자와 항일투쟁으로 무수한 옥고를 격고 자부 조화벽은 양양만세사건의 주모자로 옥고를 격었으며 중재 중오는 현장에서 총살되고 중무는 3년 도기는 1년반의 옥고를 격었다. 부인이 두분이니 초취 청주한씨는 일찍 돌아갔고 재취는 곧 이소제여사이니 3남1녀를 두시였다. 이제 충효 사상을 드높이고 복지사회를 이룩하는 새시대를 맞이하여 선생의 거룩하신 자주독립사상과 순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