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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려한다. 공은 고려 문괴 벽상 삼한 삼중대왕 검교상장군 능성 구존유 시조공은 25대조요. 문하 좌정승 면성부원군 문절공 휘 홍은 두문충현으로 분파조며 휘 봉영은 퇴계 이황 문인 충정 전라 양도 관찰사 광국공훈으로 순조 조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 호 백담 시 문단공의 12세손으로 1882년(고종 임오) 9월 10일에 영천시 고경면 학동에서 부 연길 모 김해 허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언행이 바르고 성품이 강직하여 남에게 뒤지기를 싫어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다. 10세에 권오준 훈장에 수학하였으며 20세가 넘을 때 나라 형편은 날로 기우러졌다. 때에 김녕 김씨 김영길의 장녀와 결혼 공은 의병동료들과 영천 경주 영일동해지역을 화승총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친지를 찾아 모금하고 부호와 친일파 집은 강제늑탈하여 의병의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포항경찰서에 3년 구금되었다. 다시 1909년 일인 재판장의 15년형의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 1924년에 반신불수로 만기 출소 하였으나 혹독한 고문과 옥고에 지친 공은 3일 후인 동년 9월 8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41세이다. 후사는 종손 자문을 세웠다. 일제침략의 교묘한 마수는 공의 엄연한 국국의거를 강도와 절도로 몰아 침소봉대하며 감옥살이를 시켰다. 대한제국 안에 일인재판장이 법을 다스리던 시대이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공은 이런 시대에 불행하게 살다 갔으나 광복을 맞이하자 그 높은 뜻과 빛나는 애국행적이 밝혀지니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며 그 공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