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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없어질 때가 돼서야 정남숙은 거동을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쉬쉬하는 비극도 있다 남산뫼에서 살아남은 젊은 여성들을 사. 11 단 중대 군인들이 함평군 해보면 문장리에 주둔하고 있던 중대본부로 끌고 5 가 한 달 만에 돌려보낸 일이다. 왜 중대는 이런 인간 사냥극을 왜 벌였을까 남산뫼 사건을 포함한 함평군 5 ?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난 함평군 월야 해보 나산면은 빨치산 근거지였던 , , 불갑산에서 가까운 지역이었다 수복 이후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일. 928 ․ 부 지방 좌익이 불갑산과 태청산으로 입산 인근지역에서 물자를 조달하며 , 5 중대 및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당시 중대는 불갑산과 태청산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해보면 문장장터5 에 주둔하던 초기부터 월야면 외치재의 교통요지에서 경계초소를 운용하고 있었다 년 월 일 발생한 장교 동촌마을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사. 1950 12 6 · ( ) 건은 월 일의 한새들 전투 전후로 빨치산 협력자들이 뒷산에 올라가 징12 2 과 꽹과리를 치고 만세를 부르면서 중대원을 크게 자극한 것이 원인으로 , 5 보인다 진실화해위원회 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남산뫼 사건도 이.( , 2007 ) 『 』 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대의 불법적 학살이 , 5 용인될 수는 없다 특히 권준옥 중대장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될 수 . 없다. 함평군에 세워진 개 표지석18 제 기 진실화해위원회는 함평군 민간인학살사건 건을 진실규명했다 군 1 898 . 단위로는 가장 많은 수의 진실규명이다 이렇게 함평군의 진실규명이 잘 진행. 된 데에는 정근욱 년생 함평군유족회 회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1949 ) . 는 형 정동기가 남산뫼에서 학살된 후 부모님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함평군청에 근무하던 시절 과거사법이 제정되었다 함평군수가 정 과. " 장님이 이 사업을 맡아 주세요 라고 해 정책개발 담당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 그는 이후부터 읍 면 리 단위에서 피해자 실태조사를 벌였고 진실규명신청· · , 서 작성을 도왔다 또 함평군 내 곳에 민간인 학살 표지석을 세웠다. 18 . 그는 전라남도와 함평군의 지원을 받아 함평 집단학살 희생자 기억카드 사< ( 료집 총 권 을 펴냈다 유족회에서 함평군 민간인 학살사건 자료를 총 ). 11 > . 집대성한 것으로 한국현대사의 귀중한 사료다. - 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