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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 선생 묘(韓圭卨 先生 墓)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5호
한규설(호는 강석, 1856~1930) 선생은 조선.대한제국의 관료를 지낸 인물입니다. 21세인 고종13년 1876에 처음 관직에 진출하였고, 1884년 9월 경상 우병사(종2품)로서 진주 등지에서 활개 치던 화적을 소탕하고 농민들 구휼에 힘썼습니다. 그가 진주를 떠난 뒤 그곳 백성들은 진주성안에 생사당(生祠堂)과 불망비를 세워 그를 기렸습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고종33년 1896 아관파천 직후 법부대신에 임명되어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겸임하면서 사법 진행의 공정성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897년 독립협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 관민공동회에 중추원 의장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여러 번 법부대신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고종42년 1905 국정의 전반을 다루는 의정부 참정대신에 올랐으나 일제가 을사늑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하지 그 부당성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되었습니다.
1910년 국권 피탈 때 일본정부가 남작의 지위를 수여하려 하자 정계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월남 이상재와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여러 사회단체에 많은 기부를 하였습니다.
묘는 정경부인 밀양박씨와 함께 1기의 큰 봉분으로 되어있습니다. 묘앞 중앙에는 영혼이 다니는 길인 혼유석, 제물을 놓는 상석, 향로를 두는 향로석이 있습니다. 묘의 앞옆에는 양 모양의 석상이 묘소를 지키고 있고 천막등을 칠때 끈을 묶는 돌 4개와 멀리서도 묘소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상징적 기둥인 망주석 1쌍이 있습니다. 묘의 오른쪽에는 받침돌과 검은색 몸돌, 한옥 지붕 모양의 덮개돌로 이루어진 묘비가 있는데, 이 비는 1934년 10월 그의 아들인 양호가 세웠습니다. 묘는 원흥동 웃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