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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강원도 양양지역 3 · 1운동의 전개 31 천리를 거쳐 용천리까지 행진했다. 비록 남대천에서 일본 군경의 저지로 읍내 진입은 무산됐지만, 박규 병 등은 끝까지 독립운동가 구속의 부당함을 항의하 며 기세를 꺾지 않았다. 9일에는 기독교인, 유학자, 마을 구장들이 모두 합 심해 대규모 운동을 전개했다. 면사무소 서기였던 오정현이 연락을 담당하고 각 마을 구장들이 주민들 을 인솔해 최대 1,000여 명의 군중이 하광정리에 집 결했다. 일제의 무차별 공격, ‘만세고개’의 탄생 양양 읍내의 경계가 엄중하다는 소식에 군중은 기 사문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로 향했다. 주민들은 장 작과 돌을 들고 행진했으나, 이미 강릉에서 지원받 은 일제 군경이 매복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군중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달려들자 일본 군경 은 무자비한 사격을 가했다. 이 총격으로 전원거, 임 병익 등 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의 처절했던 외침을 기려 기사문리 주 재소 뒷산 고개는 지금까지도 ‘만세고개’라 불리고 있다. 양양의 만세운동은 4월 9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8일에는 차마리 농민과 어민들이, 9일에는 서면 농 민들이 시위를 이어갔으며 한 달 뒤인 5월 9일에도 산 위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양의 3·1 독립운동은 최대 집결 인원 4,000 여 명, 연인원 1만 5,000여 명 이상 참가하였고, 사망 11명, 부상 50여 명, 체포 170여 명이었다. 일제 경 찰은 체포된 이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순국한 함홍기의 관을 파괴하고 김학구의 시신을 다시 파헤쳐 훼손하는 등 반인륜적인 악행을 저질렀다. 양양의 3·1 독립운동은 전 계층이 하나 되어 일제 당국에 큰 충격을 준 강원도 최대 규모의 항쟁이었 다. 민중들이 흘린 피와 눈물은 오늘날 양양의 산천 곳곳에 이름 없는 고개와 기록으로 남아 그날의 정 신을 전하고 있다. (이 글은 장경호, 『강원도사』20, 359~366쪽을 토대로 재작성하였음) 필자 장경호 강원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석사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역사편찬원 학예연구사, 강원대학교 강원전통문화연구 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강원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논저로는 『강원도사』 20권(의병, 독립운동)(공저); 「신간회 강릉지회의 조직과 활동」, 『한 국민족운동사연구』111, 2022; 「1920~30년대 양양지역 청년운동」, 『인문과학연구』76(강원대), 2023 등의 논문이 있다. 양양 만세고개에 세워진 3 · 1만세운동유적비 근경(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