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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명성황후 시해와 그것이 남긴 것 31 19세기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산업 혁명으로 전 세계가 새로운 문명을  누리게 되었지만, 수많은 약소국들 이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 련도 동반하였다. 그중 조선의 운명 에 결정적 시련을 몰고 온 것이 청일 전쟁이고, 그 여파로 맞은 비극적 사 건이 ‘명성황후 시해’이다. 이 사건 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상징하는 대 표적 사건으로 한국인들에게 각인 되어 왔다. 더 심각한 것은 일본에  의한 한국근대사와 인물의 왜곡이 다. 일본 측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범죄에 관련된 일본의 군민 모두를  무죄 방면한 결과, 누명을 쓴 것이  대원군과 훈련대이다. ‘헬 조선!’식  한국사 인식의 뿌리가 바로 이런 것 들이다. 초선진국 반열에 위치한 21 세기의 한국, 이제는 그런 부정적 인 식을 버리고 미래로 향할 때가 아닌 가. 청일전쟁과 일본의 조선 내정 장악 1894년 초 전라도에서는 한 지방관의 탐학에 분노하여 농민이 봉기 하였다. 여기에 동학도가 가세하면서 사태는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조 정에서 대책에 부심할 때 서울의 일본공사와 북경 주재 일본공사 등은 청군(淸軍) 파병의 필요성을 공공연히 주장하였다. 일본의 우익 낭인들 은 농민군 측에 접근해 ‘의군’(義軍)이라면서 부패한 조선 조정을 뒤엎 자는 제안까지 하였다. 청나라는 조선 사태에 일본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였고, 내외 정세의 위기를 우려한 조선 정부는 청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결국 청국은 충청 도 아산만에 청국함대를 파견하였다. 청군 파병 정보를 접한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 직후 청일간에 맺은 천 진조약(天津條約, 1884)을 빌미로 즉각 파병을 결정하였다. 인천에 상 륙한 일본군은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후 경복궁을 습격하여 조 정을 장악한 뒤 ‘조일맹약’(朝日盟約)을 강요하여 조선을 동맹국처럼 만 들었다. 이후 조선 조정에 등장한 것이 김홍집내각, 김홍집 · 박영효 연립내각 등이다. 일본의 목표는 조선을 ‘보호국화’하는 것이었고, 조선 내각 인 사들은 이 기회에 내정개혁과 함께 자주독립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일 본공사관과 조선내각의 입장은 ‘동상이몽’격이었다. 한편 일본 측은 아산만에 정박한 청국 군함을 기습 공격한 뒤 전쟁을 선포하였다. 육상과 해상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 다.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체결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일본은 청국 에게 ‘조선의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게 하고, 배상금 2억냥과 대만, 팽 호도(澎湖島),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할양하게 하였다. 명성황후의 배일정책과 일본의 대응 한편 강화조약 정보를 접한 러시아는 일본의 요동반도 확보가 시베 리아횡단철도 완공에 치명적 위협이라 여겨 즉각 대응하였다. 도쿄[東 京] 주재 러시아공사가 프랑스, 독일 공사와 함께 요동반도 반환을 촉구 하는 각서를 외무성에 전하였다(삼국간섭). 삼국의 압력에 굴복한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