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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희생과 통합 지향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 홍진 31 환국과 비상국민회의, 그리고 서거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 소식이 임시정부에도 전 해졌다. 홍진 역시 이 소식을 들었다. 광복 직후 충칭 (重慶)에서 열린 제39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그는 ‘화평공제(和平共濟)하는 새 정신에서 새출발 하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당면한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 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여야는 대립했고, 국내로의 환국 문제도 여 의치 않았다. 홍진은 광복을 맞이한 지 3개월이나 지 난 1945년 12월 2일에야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조성환, 황학수,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2진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에 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쪽에는 미군이 군정을 수 립하였으며, 좌우 대립이 심각해졌다. 홍진은 임시 정부의 광복 후 신국가 건설 구상에 따라 1946년 2 월 수립된 비상국민의회의 의장을 맡아 정식 정부 수립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국 내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결국 큰 포부를 펴지도 못 하고, 심장 천식으로 인해 1946년 9월 9일 만 69세 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참으로 파란만장하 면서도 초지일관된 민족지도자의 삶이었다. (이 글 은 이규갑, 「한성정부 수립 사실의 전말」, 『신동아』, 1969년 4월호 및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 시정부자료집』 2~4, 2005 ; 한시준, 『의회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탐구당, 2006 등을 참고함) 필자 이홍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독립기념관 연구원, 백범김구기념관 학예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우리역사 넷  - 한국사 이미지 자료 등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참여했다. 현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범정 장형의 독립운동과 단국 대 학 설립』(공저, 2014), 「해방 후 백범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과 운영」(『백범과 민족운동 연구』6, 2008) 등이 있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비상국민회의 모습(『동아일보』, 1946.2.2) 「홍진 의장 별세」,『동아일보』 보도 기사(1946.9.10, 국사편찬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