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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률 선생은 3·1독립운동 직후 전협·최익환 등이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활동했다. 일찍이 매국단체인 일진회에 참여하여 평의원과 경무위원장 등을 지내며 민족양심에 벗어나기도 했던 그는 경술국치이후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오랜 동지였던 전 협 등이 범국민적 독립운동단체를 목표로 대동단을 결성하자 이에 참여했다. 동단 가입 이후 그는 독립의식의 고취를 위한 선전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기관지 〈대동신보〉의 배포에 앞장섰고, 1919년 8월 함경북도 단천(端川)에 파견되어 김병권 등을 동지로 포섭하는 등 조직 확대에도 힘을 쏟았다. 한편 동년 10월 대동단은 본부를 상해(上海)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제1단계로 동년 10월 10일 동단 총재 김가진을 상해로 망명케 한 뒤 의친왕의 상해 망명을 추진시켰는데, 이때 그도 전 협·정남용 등과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동년 11월 9일 의친왕이 상해로 출발할 수 있었으나 이 사실이 일경에 도중 탐지됨으로써 11월 11일 만주 안동역까지 갔던 의친왕 일행은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동단의 조직은 파괴당하였고,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