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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란시켰다. 1906년에는 호서의병과 제휴하여 각처에 모여든 200여명의 덕유산의병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데 협력하였으며, 전북 장수, 무주, 고창등의 전투에서는 적 수십명을 사살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1908년 무주 구천동 삿갓골 전투에서는 호서의병및 덕유산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혁혁한 전과를 거둔 바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거명, 김권원의병이 전사하는등 피해도 컸다. 특히 1909년ㅁ 11월 전북 장수군 계북전투에서는 유춘일의병이 전사하고 박화기 아장은 총상을 입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히 박화기 아장은 함께 참여한 동생 박수기의 부축을 받고 집에 돌아와 치료받을 수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일제의 정탐군 최고미가 이를 밀고하여 박화기, 박수기 두 형제는 전북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었고, 폭도협의로 그해 11월 16일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에서 일제의 총격에 의해 순국하였다. 최고미의 밀고행위는 계속되어 1909년 12월 7일에는 하일청의병이 적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3년 후인 1912년 4월 26일 적은 다시 정탐꾼 최고미를 월성에 잠입시켜 의병의 행적을 내사케 했다. 이에 동민은 불안에 떨게 되었고 치미는 분노 또한 억제할 길이 없었다. 결국 동민은 정탐꾼을 찾아내어 만산별관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곧 적은 월성에 대거 출동하여 전 동민을 모아놓고 혹독한 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동민은 노소를 막론하고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동민이 집단타살했다. 그 이유는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피살케 하였으니 용서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고, 마을의 안정과 남은 의병들의 생명이 촌각에 다쿠는 상황이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박민기의병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사감으로 한 단독소행이다. 내가 드를 죽인 뒤에 군중이 모여든 것이다. 동민은 나를 구출하기 위한 동정심에서 거짓말을 했다"라고 크게 외쳤다. 동민은 물론 적까지도 아연실색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의 행위는 은폐되었고 동민은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민기 의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