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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명(柳子明) 1894.1.13~1985.4.17 / 임시정부 / 건국훈장 애국장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계획하던 중 일경의 밀정에게 사전탐지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망명하기전 청년 외교단을 조직하여 할동하기도 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충청도 대표위원으로 선출 활동하는 한편 조선 식산은행과 동척을 습격한 나석주 소개로 의열단에 가입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는 월간 동방민족을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발간하여 관계되는 여러나라에 발송하였으며 비밀리에 각국의 인원을 선발하여 비밀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운동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공작을 추진하였다. 같은해 5월에는 조선혁명자연맹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무창의 입단학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30년 4월에는 상해 강만의 농학교사로 있으면서 [남하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으며 1936년에는 중국군과 합류하여 전시 공작대로서 항일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약헌 개정 기초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43년 3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에 임명되었고 광복까지 임시정부 의원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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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석(魚允奭) 1846.5.6~1898.2.17 / 의병 / 건국포장
성재 유중교의 문인으로 아들 어경선과 함께 1896년에 유인석이 이끈 제천의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화서학파의 문학적 특징인 춘추대의적 존화양이 사사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었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의병활동 중에 남긴 글에서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세분 선생의 문화들이 일생을 통해 강설한 것은 서학을 배척하고 왜적에 대해 복수하는 것 뿐이다 (중략) 나라를 사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거에 누가 창의하지 않으며 원수를 갚고 형세를 보존하는 일에 누가 거사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일을 차마 어찌 말로 다하랴 대의를 펴서 천하를 구하기 위해 죽으니 죽은 명분을 찾을 것이다. 그후 유인석이 휘하 의병을 이끌고 황해도 평안도 등 양서 지방을 거쳐 재기를 위해 서간도로 망명할 때 아들 어경선과 함께 동행하여 갖은 고초를 격었다. 서간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98년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기진(李起振) 1869.9.21~1908.6.7 / 의병 / 건국훈장 애족장
1895년 유인석이 제천을 중심으로 거의호좌 의병진을 조직하였을때 여기에 참가해 흥선표 정화용 등과 함께 종사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얼마뒤 호좌의병이 관군에게 패해 북상길에 올라 낭천에 이르게 되었을때 소토장 서상렬은 관군과의 전투에서 장열히 전사하였다. 이에 유인석의 명을 받고 송현구와 함께 서상렬의 시신을 수습해 3백여리나 떨어진 제천으로 반장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뒤 병고로 인하여 동량면 하곡의 후학 양성과 도의 구현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