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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6년 3월 Special Theme  광복 제81주년 기념 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 양상과 특징 ③ 기와 ‘대한독립기’, 그리고 주촌리의 ‘농자천하지대 본(農者天下之大本)’ 기가 펄럭였다. 그 뒤를 징, 꽹과 리, 날나리를 든 농악대가 따르며 시위의 기세를 북 돋았다. 남대천에서 경찰의 완강한 저지에 부딪혔으 나, 주민들은 흩어져 우회하는 기지를 발휘해 결국 양양 시위 군중에 합세했다. 6일과 7일에는 서면 상평리 농민들이 독자적인 시 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이미 4일 양양 시위에서 주도 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었다. 특히 의병 활동 경험이 있던 박춘실이 시위를 이끌 었다. 상평리 농민들은 4일 시위 중 경찰 의 총탄에 피살된 김학구의 장례식을 계 기로 다시 궐기했다. 주민들은 비통함 속 에 상여를 메고 면사무소로 진입했다. 독 립만세 소리와 상여곡이 뒤섞인 가운데, 분노한 군중은 돌을 던져 면사무소 창문 을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상여 가 고향인 강현면 침교리로 향하던 중, 물 갑리 고개에서 운구 인계 작업이 이루어 졌다. 이때 양양경찰서를 공격하러 가던 강현면 군중과 운구 행렬이 마주쳤고, 이 들은 길 위에서 함께 통곡하며 항일 의지 를 다졌다. 김학구의 상여를 인계하고 돌아온 상평 리 주민 100여 명은 장례식에 불참한 면 직원들의 행위에 분개하였다. 6일 밤 집집 마다 연락하여 7일 면사무소로 쳐들어가 면장을 규탄하고 직원들을 질책하며 건물 을 파괴하였다. 격분한 농민들의 강렬한 시위로 면사무소는 사무를 중지하고 12일 까지 군청으로 철수하였다. 원래 현북면은 9일에 합동 시위를 하기로 계획했 으나, 박원병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가 체포되 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이에 그의 형 박규병과 마을 유지들은 계획을 앞당겨 7일에 거사하기로 했다. 7일 아침, 주민과 서당 생도 등 100여 명으로 시작 된 행렬은 금세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 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양양 만세운동의 총본부인 임 치열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던 기사문리 주재소 뒷산 고개에 세워진 ‘만세고개’ 기 념비 (필자 제공)       양양읍 현산공원에 세워진 양양 3 · 1운동기념비(박원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