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page


30page

을 올렸건만 그 때문에 도리어 추자도로 귀양가니 때에 나이는 44세 이덤해에 조병세 공이 좌상이 되어 선생을 위해 진언하여 6월에 특사를 받고 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그해에 흉년이 들어 특히 흥해고을에 기근이 심하여 위에서는 선생에게 군수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므로 선생은 그곳에 이르러 관리들의 부정을 바로잡고 조정에서 내려주는 백미 2백섬을 군민들에게 나눠준 뒤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차츰 시국조차 어지러우므로 수파라 호 하고서 출세할 뜻을 끊어버렸다. 다음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대원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10년 뒤 56세때 을사조약이 성립되자 매국적들을 처참하라는 상소문을 지어 들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아우 창제공이 이미 서울에서 유생들과 함께 같은 뜻으로 상소문을 올렸으므로 나만 통곡하고 돌아왔었다. 다시 5년 뒤 61세때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방문을 닫고서는 7일동안 먹지 않고 자결할 결심을 품었더니 일본 순사가 강제로 선생을 끌어내어 창녕감옥에 가두고 돈으로 유혹했으나 도리어 큰소리로 꾸짖으므로 일본경찰은 선생을 석방하고 아들 철상공을 대신 가두고 또 돈으로 유혹했건만 아들도 어버이의 뜻과 같아 철상공마저 풀려나오자 선생은 몸을 일으켜 압록강을 건너 망명의 길을 울며 떠나니 62세 겨울이었다. 선생은 눈바람을 무릅쓰고 만주 류하현으로 임강현으로 옮겨다니다가 뒤에 안동현 접리수에 자리를 잡고 이건승 등 여러 동지와 함께 나라를 걱정하다가 1916년 12월 17일 세상을 마치니 향년 67세 그곳에 장례 모셨다가 뒷날 고향 귀래동에 반장했으며 부인은 안동권씨요 1남 2녀의 자손 퍼졌거니와 조국이 광복된 오늘 우리는 선생의 높은 뜻을 깊이 전하고자 여기 그의 행적을 대강 새겨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