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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57 겠다. 즉, 김법린 연구에서 그의 삶은 타계 후 20년이 지난 뒤에서야 정리 된 「佛敎사상으로 抗日 앞장 梵山 金法麟」(부산일보사 편)3)의 내용을 그 대로 따른다. 그런데 김법린 선친 이름의 와전 4)처럼 이를 전적으로 신빙 하기에는 재검토의 여지가 발견된다. 한편,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서 김법 린이 참가해 배포했다는 ‘문건’도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대회장에서 배포 했다는 한국의 문제 에 대하여, 참가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미륵(이의경) 과 관련지어 소개하거나 5) , 김법린의 연계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6) 이에 반 해, 이극로를 그 작성자로 보는 경우도 있다. 7) 논자는 그간 인용되었던 김법린 자료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국내외에 서 새로운 사료 발굴을 시도하였다. 먼저 국내 사료로서 김법린 자신이 타계 1년 전에 남긴 「내 人生 遍歷의 廻廊에서」 8)를 위시하여, 「楊渾虛 履歷書」 9)와 한글모 죽보기 10) , 김법린의 제적등본 11) 을 보조 사료로 확 보하였다. 다음, 해외 자료의 경우 학계에서 일찍이 한국독립운동 유럽 사료 발굴의 중요성이 제기된 바 있었다. 12) 논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 담 소재 국제사회사연구소(IISG)에서 김법린의 연설문- 한국에서 일본 3) 부산일보사 기획연구실(1983) pp.197-215. 4) 송진모(2007) p.26.; 김법린 선친 이름이 「佛敎사상으로 抗日 앞장 梵山 金法麟」과 「제 적등본」에 金玎宅으로, 족보 에 金炯相으로 기록돼 차이를 보인다. 5) 이정은(1999),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 김광식(2000) p.306. 7) 박용규(2005),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서울, 차송, p.83.; 홍선표(2006), 「1920년대 유럽에서 의 한국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p. 469. 8) 김법린(1963), 「내 人生 遍歷의 廻廊에서」, 人生을 어떻게 살 것인가? , 서울, 삼양문화사. 9) 朝鮮總督府(昭和三年), 「銀海寺住持就職認可ノ件」, 寺刹住持就職認可本末寺法中改正 其他의件 .; 본 사료에 양혼허의 이력서와 호적등본이 첨부되어 있다. 10) 이규영(1988), 「한글모 죽보기」, 한힌샘연구 1, 서울, 한글학회 영인, p.190.; 김법린 은 범어사 시절 영향 받은 사람으로 권덕규와 서상일을 언급하였는데, 본 사료로 권 덕규의 범어사 강의 시기를 알 수 있다. 11) 「金振麟 除籍謄本」. (김법린의 2남 金仁鳳 제공) 12) 정용대(1989), 「구주에서의 韓國獨立運動 史料발굴의 當面課題」, 한국민족운동사연 구 4, 서울,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