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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12 제6093호 갈매기섬에서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된 민간인들의 유골을 박문규 문화원장이 수습하고 있다. 3부 갈매기섬의 비밀 띅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역사의 한을 품고 있는 갈매기섬 전경. 갈매기섬에서 발견된 유골들. 해남신문사와 진도문화원이 공동으로 마련한 3차 갈매기 섬 답사에서 박문규 문화원장은 갈매기섬 유골 발견 경과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 전국단위 유족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유족회 활동을 보고하고, 50년간 갈매기섬에서 떠돌던 원혼들을 위한 천도재를 마쳤다. 그리고 3차 답사를 마치고 일행이 모두 진도의 한 음식점 에 모여서 유족들 20여 명과 함께 룏6 굛25 사변 유족회룑를 구 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조사에 적극 가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 의 노력을 다하기로 결정했다. 흩어져 있는 유골을 애타게 찾고 있는 유족들. 룕 국 가 反 인 권 행 위 규 명 해 원 혼 의 恨 풀 어 줘 야룖 유족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유골들을 바라보고 있다. 법도 상식도 무시되던 세상 이유없이 끌려가 총살 당해 유족들 룕가슴에 恨묻고 살아룖 해남군 유족회는 룏국회통합 특별법 제정 청원룑 룏유해수습 및 유가족 인도룑 룏희생자 위령행사룑 룏묘지 조성과 진혼비 조 성룑 룏한국전쟁사 정사 기록룑 등의 사업을 펼쳐나가겠다는 계 획을 발표했다. 이날 해남군 유족 회장으로 선출된 오길록(64)씨는 이렇 게 말했다. 룕보도연맹 사건은 절대 불명예스런 일이 아 닌 국 가의 명백한 반인권행위로 하루라도 빨리 진상이 규명되어 야 한다. 우리가족은 지난 반세기 동안 남모르는 마음의 고 통을 짊어지고 살았다. 앞으로 국회통합 특별법 제정을 통해 명예회복에 앞장서겠다.룖 유족회가 결성 되면서 룏이제는 말할 수 있다룑는 취지 아래 그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로 했다. 이날, 산이면 상공리가 고향인 오길록(당시 9세)씨는 형 오철수씨가 잡혀 가던 상황을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1950년 7월14일 토요일 밤, 산이지서 경찰과 젊은이 3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형은 당시 해남군청에 근무했고 결혼 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신혼이어서 일찍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밖에서 남자들이 형의 이름을 부르자 형이 방문을 열고 룕누구요?룖 했을 때 막무가내로 신발을 신고 마루로 올 라 온 경찰들이 형을 끌어내려 산이지서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해남경찰서를 경유해 화산 해창에 서 배를 탔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는데, 그 뒤로 형의 소식은 영영 끊기고 말았다. 우리 가족은 형의 소식을 알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헛일이었다. 특히 식음을 전폐한 노모의 노심초사는 옆에서 볼 수 가 없을 지경으로 안타까웠다. 그런데 한달 쯤 후, 갈매기섬으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 로 목숨을 건진 산이면 금호리 박상배(작고)씨가 돌아왔다 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상배씨 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연고된 사람들의 생사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박상배씨는 거의 실성한 듯 입을 꽉 다물 고 고개만 살레살레 흔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답답했지만 입을 열지 않 으니, 오죽 큰 충격이었으면 실성한 듯 사람이 변했겠느냐 면 서 기다리기로 했다. 박상배씨는 15일간 갈매기섬에서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 돌아 온 기적의 사나이였다. 좀체 입을 열지 않던 박상배씨는 몇 년이 지난 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산이면 사람 박상배씨는 당시 보도연맹원들 모두 갈매기섬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며 그때 총살당한 사람이 3 00명도 넘었다고 말했다. 털어놓은 사실은 뜻밖이었다. 박상배씨는 화산 해창에서 함께끌려 온 여러 사람들과 줄 줄이 포승줄에 묶여 배에 실려졌다. 경찰은 그들을 무인도 갈 매기섬에 접안, 산 중턱까지 끌고 갔다. 경찰은 산 중턱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숨 쉴 틈 도 없이곧 바로 총을 쏘 기 시작했다. 박상배씨는 경찰이 총을 난사하기 직전 의식적으로 먼저 쓰러졌다. 박상배 씨가 일부러 쓰러진 직후, 그 자신의 몸 위로총살당한 이웃들이 한꺼번에 덮치면 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박상배씨는 경찰이 확인 사살까지 하고 돌아 갈때까지 숨 죽이고 있다가 시체더미를 뚫고 빠져나왔다. 산더미처럼 쌓 인 시체를 보는 순간, 박상배씨는 기절했다. 하루 만에 눈을 떴다.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박상배씨는 흩 어져있는 고무신에 빗물을 받아 목숨을 부지했다. 얼마 만인 가, 갈매기섬 쪽으로 어선이 다가왔다. 박상배씨는 안간힘으 로 손을 흔들며 룕살려주시오.룖 하고 소리 질렀다. 어선이 다 가왔고 그는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천행으로 살았다고 말하며 룕혼자 살아와서 마을 사람 들에게 면목 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을 숨어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지금도 미안한 마음뿐입니다.룖하고 말하면서 눈시 울을 붉혔다. 박상배씨의 증언을 따라, 1964년 4월 오길록씨는 형과 같 이 붙잡혀간 여덟 가족, 오홍택, 오경용, 오형록, 오명택, 오철 수, 오자록, 서복진씨와 함께 송지 어란에서 배를 타 고 갈매 기섬으로 시신을 찾으러 갔다. 당시 오씨 일행을 안내해 준 박상배씨는 함께 끌려 온 마을 사람들이 일렬로 묶인 채 총살되었기 때문에 총살현장을 정 확히 알고 있다면서 손가락으로 현장을 가리켰다. 일행이 그 현장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시신은 모두 썩어 뼈만 굴러다녔 다. 그날 갈매기섬에 함께 갔던 일행은 박상배 씨가 일러 준 위 치에 있는 뼈들을 한데 수습하여 해남으로 가지고 가서, 뼈들 을 나누어서 각자의 선산에 안장하기로 했다. 한무더기로 엉 켜있는 유골은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고, 갈매기 섬으로 유골을 수습하러 간 해남 사람들은 모두 친인척이었 기 때문에 그런 방법으로 유골을 안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운 좋게도(?) 서복진 씨의 유골은 고스란히 찾을 수 있었다. 박상배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날 같이 끌려간 서복진 씨는 총을 맞고, 포승이 풀리면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도망치는 서복진 씨를 경찰이 뒤에서 총을 쐈고, 서복진 씨는 조금 떨 어진 나무 밑에서 죽었다. 박상배씨는 시체들 틈에서 숨죽이 고 그 현장을 목격했다. 실제로 한꺼번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유골들과 조금 떨어진 나무 밑에 인골 한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것이 서복진 씨의 것이라 단언하여 서 씨 가족은 그 유골을 그대로 수습하여 가지고 왔다. 그들은 모두 산이면 상공리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해남 경찰들은 집단 학살 장소로 왜 갈매기섬으 로 정해졌을까? 이내 답이 나온다. 첫째, 갈매기섬이 무인도여서 사건 은폐가 용이하다는 점, 둘째, 갈매기섬이 해남 관할 지역 이 아니어서 훗날 책임소 재가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 셋째, 갈매기섬이 해남 어란, 화산,해창 등에서 쉽게 접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조건에 의해 갈매기섬은 그야말로 거대한 떼 무덤이 되었고 반세기 동안 철저히 은폐되어 사람들의 기억 에서 사라질 뻔 했다. 또한 사실을 알고 있던 유족들도 큰 충 격과 피해의식,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가슴에 묻고 살았던 것 이다. 다음은 갈매기섬의 떼죽음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취재 보도 했던 해남신문 박영자 기자의 글을 발췌했다. 룏중략, 보도연맹으로 등록되어 경찰의 관리를 받아 온 사 람들의 소집은 각 지서에서 동시에 이뤄졌다는 게 당시를 살 았던 노인들의 증언이다. 송지, 산이, 북평, 현산 등 모든 지역 에서 6굛25가 발발하자 이들을 소집했다. 그런데다 각 지서마 다 소집할당제를 두어 그 수만큼 소집하지 않으면 문책을 해 서로 친한 지서장끼리는 소집한 보도연맹을 꿔주기도 했다 는 증언이 있다.룑 당시 산이면은 보도연맹원이라며 강제 소집한 사람이 너 무 많아 마산면으로 일부를 주었다는 게 이곳 노인들의 주장 이다. 법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지서장들의 손가락 하나만으로 생사가 결정되던 시절 산이면 지역에서는 너무 도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학살되었다. 산이면 사람들만도 10 0여 명이 넘었다고 증언하는 노인들이 있었다. 현산면에서도 보도연맹원에 대한 일제 소집령이 내려졌 다. 이때 현산 지서는 마을사람들에게 회의가 있다고 소집해 놓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 이름을 호명해서 대답한 사람은 남기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이름이 호명된 사람은 송지 어란을 거쳐 섬 어디론가 끌려 갔다는 게 이곳 노인들의 증언이다. 지역 곳곳에서도 쏟아지는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보도연 맹원 학살은 각 지서마다 독자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또 학살 날짜도 모두 일치하지 않고 있어서 여러 날에 걸쳐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굛향토사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