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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18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순교, 또는 행방불명 되었는데 그 가운데 광주 교구장으로 있던 미국인 바드리시오 안 신부와 산정동 본당 주임 신부이던 아일랜드인 고 도마 신부, 산정동 본당 보좌 신부 아일랜드인 오 요한 신부 등도 행방이 묘연하여 산정동 본당에는 현재 세 분의 순교 기념비만 세워져 있다. 당시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잡혀 대전으로 이송되어 온 세 성직자는 대전시 목동 성 프란치스꼬 수도원 입구 좌편 마루방에 민주 진영 인사 및 신자, 지도계급층 인사들과 함께 감금 당하여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 이들과 같은 방에 갇혀 있다가 해산일이 가까워 석방된 당시 충주 검찰청 오 검사 부인이 알려주어 알 게 된 사실이다. 이후 9월 26일부터 28일 새벽까지 총성이 계속 들리더니 인민군들은 북으로 쫓겨 갔는데 세분 성직자가 있던 방에서는 인기척은 없고 다만 바드리시오 안 신부의 여권과 명함, 성무 일도가 발견되었다. 이 때 오기선 신부는 세 분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충남 사회과 도청 직원을 대동하고 성 프란치스꼬 수도원 뜨락의 길이 10m, 높이 170cm의 구덩이를 파헤쳐 인민군들이 사살한 시체들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수도원 뒷뜰에 있는 37척 되는 우물 속과, 수도원 뒤 구덩이도 파 보았으나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전신에 콜타르를 칠하여 죽였고 사살된지 오랜 시일이 지났기 때문에 시체가 부패되어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오 신부는 다시 대전 형무소도 가 보았으나, 1천 명씩 넣어 죽인 우물 8개 속에서도 성직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출처 : 103위 한국순교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