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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로(洪承魯) 1894.06.13~1964.12.17 / 일본 방면 / 건국훈장 애족장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화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 이은과 일본의 이본 궁녀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도깁에 장애가 도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로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게몽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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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희(鄭泰熙) 1898.01.08~1952.03.19 / 임시정부 중국 방면 / 건국훈장 독립장 1919년 3.1독립운동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각도대표 박인관 정덕생 박승명 등과 1919년 10월 2일 평양에 모여 대한국민총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지원, 민지개발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다짐하였다. 1919년 12월에 상해의 임시정부내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1년 7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의 참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 23일에는 대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제6회 간사회에서 간사로 피선되어 광복활동을 하였다. 1923년 5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 제1과 상임위원회의 상임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927년 1월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약헌 기초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8년 8월에는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8월 9일에는 상해 교민단의 총무로 피선되어 교민들의 안전과 재산보호 등에 힘쓰며 사회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후 국내에 들어와 활동할 목적으로 입국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34년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