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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 서울로 이주하여 휘문고보에 진학하였다. 백농학원시절부터 사제간 애국의지를 확인하고 휘문고보에서는 친일교장을 배척하는 격문을 써붙여 제적되고 1925년 대구에서 이정기 이육사및 장진홍등과 구국비밀결사를 하였다. 6.10만세사건후 일제의 음해로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가 고사지경에 처하자 독립운동에 몸바칠 비장한 각오로 이육사와 함께 이정기 동지의 외숙 이완 중국명 공인장군을 찾아갔다. 그를 통하여 북경과 상해에 훝어진 임정요인들을 만났고 다시 임정단합의 전열정비를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자 선생은 정신과 전력의 무장이 우선 과제라 단정하여 군관학교설립을 주창하였고 이에 동감한 이완장군의 노력으로 북경정부의 전적인 지원을 확약받았으나 우리군관학교는 민족자본이 바탕이 되어야한다는 선생의 주장으로 자금마련을 위해 1927년 8월 이육사와 동반하여 비밀리 국내에 잠입하였다. 먼저 선생의 전재를 자금화하고 다른 모금에 나선 결정적 시점에 대구의 폭탄사건으로 전국에 비상경계령이 선포되고 비밀결사 9명이 체포될때 선생은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일제는 극악한 방법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을 2년이 넘도록 강행했으니 끝까지 정의를 외치며 항거불복하였다. 이런 와중에 선생의 고향 영천과 이육사의 고향 안동에서 폭탄사건계획이 탄로나 두곳다 당자가 자결하자 백학학원을 주목하고 서만달교사등이 고초를 받고 사직했다. 엄중한 보도관제속에서도 소문은 전국에 퍼지면서 일제는 더욱 악랄해졌고 장진홍이 대판에서 잡혀와 끝까지 단독거사라고 주장하며 재판중에 판사에게 의자를 던지는등 항거하여 밤마다 옥중에 만세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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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결과로 선생에게 가학은 일년여 더 지속되었고 장진홍열사는 사형집행 전날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옥중 과세3년에 출옥후 와병 중에도 선생은 중국으로의 탈출을 꾀하였으나 계유년 정월 자식의 옥바라지에 화병을 얻어 부친이 타계하고 5월에 백형이 운명하니 연이은 상사는 출천의 효우를 이상으로 했던 선생에게 청천병력으로 다가와 독립운동전선으로의 출가를 멈추게 하였고 후반의 생애가 육영사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아 향민들의 탄호하는 모습을 보며 선생은 왜적에게 설분하는 길은 문명강국의 건설이며 그것은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향민을 교육할 상급학교 설립을 위하여 주위를 설득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나 산동중고등학교가 조기에 창설된것도 선생이기에 가능하였으니 항시 명예와 영광은 남에게 돌리고 노력과 무언의 실천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선생은 분명 영원히 우리가슴에 남을 사회의 횃불이었다.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