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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기미 독립만세 운동 시에 구국청년으로서 애국충절에 참가하시고 선견지명으로써 향리의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하여 학교를 창립하시는 등 후세를 위하여 빛나는 공적을 남기신 두 어른이 지재 김상집 선생과 인암 전익진 선생이시다. 지재 김상집 선생은 1888년에 함안군 여항면 평암리 백암에서 출생하시여 어릴 적부터 재질이 뛰어나며 용력이 출중하셨고 의분에는 남에게 앞장서는 기백의 소유자인 동시 애국애족 정신이 투철하시며 인암 전익진 선생은 1894년에 함안군 여항면 금암리 상촌에서 출생하시어 그 성품이 강직담대하시고 총명이 영리하시다. 두 어른의 업적을 회고하면 이조 말엽 시 왜인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함에 애국충절의 정신으로 구국운동에 참여코져 동지 조계승 이희석 안재영 박노일 남병희 선생 등과 3.1운동 봉기의 사전모의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시고 거사당일 함안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시든 중 왜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셨다. 옥중에서 시대의 발전과 사회진보를 선각하시여 출옥 즉시 향리에 돌아오셔서 전 가산을 육영사업의 기금으로 하며 사립 창동학교 설립을 위시 여항공립보통학교 승격 과정까지 온갖 풍상과 고난을 당하심과 동시에 애국지심으로 항상 구국운동에 앞장 서시여 상해임시정부 재정을 담당하신 이교재 선생과 연락하시면서 군자금 조달에도 진력하셨다. 이러한 애국충정과 향도 발전을 위한 애향심으로 평생토록 애국애족의 신념으로 지나면서 지재 김상집 선생은 52세 인암 전익진 선생은 49세를 일기로 일평생 소원이시든 조국광복의 기쁨도 민족과 더불어 함께하시지 못하신 채 세상을 떠나시니 그 한이야말로 어찌 필언을 다하리요. 이에 양선생의 후예는 김상집 선생의 자로 재기 손에 학성 학용 학신 전익진 선생의 자로 수용 태용 용국 등이다. 이에 우리 향민들은 두 어른의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동시 이를 추모코져 이 비를 세우나니 만시지탄은 있으나 양선생의 행적은 영원히 빛나리라. 이를 건립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