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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문(朴泳文) 열사
1919년 4월 4일 아침, 남전교회 박응춘 장로의 천금같은 아들 박영문 열사는 제2지대를 인솔하고 솜리장터에 도착하였다. 6개월 전에 결혼한 박영임 새댁은 옷고름을 입에 문 채 말 한마디 못하고 어린 낭군을 전필하며 하염없는 눈물만 흘려야 했다. 도남학교 스승인 문용기 열사의 지도로 반장인 박영문 열사는 학생들과 함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다녔다. 박영문 열사는 상점문을 연 상인들에게는 애타는 소리로 문을 닫고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사정하였다. 12시 30분! 맨 앞에서 문용기 열사와 함께 박영문 열사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대모를 선도하였다. 대교농장 앞 사거리에서 일본 헌병은 잔인하게 그의 복부를 총검으로 찔렀다. 쓰러진 박영문 열사는 장을 움켜쥔 채 다시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세 번 외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니 그의 나이 꽃다운 15세이었다. "부자비한 일본 헌병의 칼날에 님은 가셨지만 대한독립을 염원하신 큰 뜻 청사에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