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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조선의용대의 창립과 중국 화북지역에서의 활동 29 당초 조선의용대는 중국 경내에 살 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한인들을 포섭하 여 대오를 확대하고 정규군의 토대를 구 축하고자 했으나, 창설 초기 활동의 중 심지였던 화중·화남 지역에는 한인 인구 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에 따라 대원 들은 불가피하게 일본군 또는 중국 괴뢰 군 출신 사병 대상의 포섭공작만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화북지역은 국내에서 시행된 소위 ‘지원병제도’와 일본군 점 령지 안정화 정책에 따른 일제의 이민정 책으로 한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 었다. 특히 화북의 적 점령구역 내에서 급속히 성장한 한 인 이주민 사회는 항일투쟁의 잠재적 기반으로 인식되었 다. 조선의용대는 이들을 조직적으로 포섭·무장시켜 부대 규모를 비약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러한 정세 인식에 따라 화북공작에 집중코자 했던 것이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본부는 충칭(重慶)에서 전·후 방의 주요 간부들을 소집하여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부 대 주력의 화북지역 파견을 공식적으로 결정하였다. 여기 서 지칭하는 화북지역이란 곧 황하(黃河) 이북의 일본군 점령지와, 일제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유격구를 포함한 다. 각 지역에 분산 배치되었던 조선의용대 전방부대는 1941년 봄까지 황하와 인접한 국민당 관할구역인 하남 성(河南省) 낙양(洛陽)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일 정 기간 훈련을 받은 뒤, 같은 해 봄부터 가을까지 네 차례 에 걸쳐 황하를 넘어 하남성 북부 임현(林縣)에 파견되었 다. 이어 임현에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 근거지인 태항산(太行山) 지구로 순차적으로 진입하여, 이미 1940 년부터 그곳에서 활동하던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지도를 조선의용대원의 야전 활동 모습. 왼쪽 사진은 연을 이용해 일본군 지역에 삐 라를 살포하는 장면이며, 오른쪽 사진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침투한 대원들이 삐라와 벽보를 제작하는 장면(『今日中國』 제1권 제6기, 1939.12) 중경에서 열린 한인 포로출신 조선의용대 신입대원의 깃발 수여식 한인 포로출신의 조선의용대 신입 여성대원들(출처: 中 央社, 『中華(上海)』 제82기, 1939년 10월,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