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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가평의 일과 인맥 藏(가장)된 書籍(서적)을 불사르고 義慣心(의분심)이 충만하여 風前燈火(풍전등화)와 같은 國難(국난)을 보시고 信義(신의)의 雄l熾(기치)를 올리셨으니 忠北(충북)提) 11 (제천)의 }頂學 (석학) 數華(의암) 째[1購錫(유인석)의 수제자 松雲(송운)鄭雲慶(정운경)同志(동지)와 提川(제 천)忠州(충주)에서 ↑昌義(칭-의)하였다 外交權(외 교권)이 찬탈 當(당)하는 一九O五年(1905년) Z딘保護條約(을사보호조약)이 彈制(강제)縮結(체결)되자 공은 金來弼(김 내필) 處賢洙(경현 수) 李鳳學(이 봉학) 姜遠驚(강원형)李購淳(이인순)柳東熙、(유동희) 李相購(이상인) 등 同志들 과 十三道(13도) f需約所(유약소)를 設置(설치)하고 需約所(유약소)를 代表(대표)하여 八道 (팔도)列둠(열읍)에 微烈(격 렬)한 樓告文(격고문)을 發送(발송)하고 6Ô(을사)五械(오적)을 해彈(규탄)하는 上減(상소)를 올리셨으 (후면) 며 이듬해인 一九O六年(1906년)에 湖南(호남)의 潤’生(유생) 奇山度(기산도) 등과 平北(평북) 으로 移居(이거) 띔義(창의)하였고 救國(구국)J혐豪運動(계몽운동)을 展開(전개)하던 중 忠正 公(충정공) 閔해〈換(민영 환)이 亡國(망국)의 한을 품고 自決(자결)하자 당시 新民會(신민회) 의 機關紙(기관지)라 할 수 있는 大韓每 日며報(대한매일신보)에 血竹R武(혈죽부)란 詩(시)를 지 어 萬폐(만방)에 울분을 聲討(성토)하시는 등 름路(언로)를 통하여 三千뿔(삼천리) 행까 따11拍(방방곡곡)에 民聚(민중)의 ~좋起(봉기)를 l탠訴(호소)하였다. 一九O七年(1907년)에 高宗 렬帝의 退位消息이 알려지지- 民心(민심)은 慣爛(분개)하여 全國(전국)이 술렁일 때 李職榮 (이인영 )대장 揮下(휘 하) 副將(부장)으로 大韓(대 한)關東(관동)1昌義(창의 )部隊(부대)에서 活 鍵(활약)하였으며 다음해인 一:hO八年(1908년)-月 (1월)에 楊洲(양주)에서 試|룹I(시 도)한 十 =道(13도)聯合(연합)義兵(의 병)部隊(부대)의 京城(경성)쫓還(틸-환)作戰(작전)은 京城(경성) 을 직접치고 들어와 慢略(침략)의 아성 인 統藍府(통감부)를 몰아내고 6Ô保護-條約(을사보 호조약) 및 丁未(정 미) 七條約(7조약)둥 휩國條約을 폐기 선언함과 동시에 각국 영사관에 日 帝의 不法的 罪狀을 聲討하여 國權을 回復함이 었다 -1-三道(13도) 聯合義兵部隊(연합의 병 부대)가 東大門(동대문) 밖 三十별(30리)에 당도했을 때 總大將(총대장) 李짧짧榮(이 인영)의 父親(부친) 別世(별세)悲報(비보)가 本陣(본진)을 거 쳐 李離榮(이인영)에게 通報(통보)되지­ 國家存亡(국가존망)의 간두에서 莫重大事(막중대사)를 |또山(왕산)에 훗任(의임)하고 歸쩨 (귀향)하였는데 京城(경성)쫓還(탈환)을 덤 前(목전)에 둔 聯合義兵部隊(연합의병부대)가 厭r b間(순식간)에 露散(무산)되고 말았으니 아! 痛I漢(통탄)哀惜(애석)한 일 이로다 一九OfL年 (1909년) 五月 (5월)에 公(공)의 手下(수하) 義兵(의 병)을 引率(인솔)하여 日 本(일본)守備隊 (수비대)와 맞서 進醒(진격)戰(전)을 展開(전개)하여 日木(일본)單(군) 陣地(진지)를 기습하 고 電線(전선)을 切斷(절단)하여 통신을 마비 시키는 등 맹활약을 試|뭘I(시도)하였으나 近代 的(근대 적)火力(화럭) 兵器(병기)의 不足(부족)으로 쫓기고 쫓기던 公(공)의 義兵(의병)꼼I~隊 (부대)는 楊洲(양주)J]II平(가평)펀) 11 (화천)을 거쳐 楊 ~I (양구)까지 쫓기 여 산악게 랄라전을 싸 |해(전개)하던 중 江1京道(강원도) 華)11쩨(화천군) 南面(남면) 풍lL댄(완깅리 ) I Li 1 11 (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