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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서남해안 지역의 인민군들은 불갑산을 타고 후퇴하였는데 복길에도 7~8명의 인민군이 지금의 복길교회에서 거주하고 있어는데 그 무렵에 사라졌다. 아직 국군에 의해서 치안이 회복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주민들은 급한 마음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국군 대신에 들어선 사람들이 치안대로 불리는 사람들로 모두 30여명이었다. 이들은 죽창, 일본도, 총 1자루를 들고 마을을 둘러싸고 집집마다 뒤지기 시작하였다. 숨어있는 사람은 끌어내어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선창가로 끌고 나왔다. 장희선이라는 사람은 누가 했는지(만세, 국군에 동조)를 다 안다면서 지금의 복길 횟집 담 밑으로 일부 사람을 구분해서 앉히고, 나머지는 선창가에 두 명씩 끈으로 묶었다. 그 날은 추석을 지내고 3일 후인 음력 8월18일이었고 양력으로는 9월29일이었다. 끈으로 묶은 사람을 3척의 풍선배에 싣고 마을 앞 바다 가운데서 수장시켜 버렸다. 다행스럽게 장희선에 의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는 쪽’으로 구분된 젊은 사람들은 그날 저녁 후환이 두려워 남성리 고개를 넘어 소재지 청계로 나가려다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그 곳에서 기다리던 장희선씨 일당을 다시 만나 모두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모두 86명에 이른다. 모두 29가족 86명, 이들 중 이름을 알 수 없는 외지인 18명을 제외하면 68명이 복길사람들이다. 7~5명의 가족이 죽은 경우가 3가족, 나머지는 3~2명이 10여 사례, 1명만 죽은 경우 10여 사례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