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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란?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시대에 일본군 '위안소'에 강제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들을 '정신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정신대는 '일본 국가(천황)을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가 노동력 동원을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정신대(노무동원)와 아안부(성동원)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달랐으나, 여자근로정신대 동원 여성이 위안부로 끌려간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호도되어 잘못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위안소 설치, 경영, 위안부 모집, 수송에 이르는 전 과정은 일본군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갔습니다. 내무성, 외무성 등 일본정부기관과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도 적극 협력하는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여성이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방식은 취업사기, 협박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마 및 유괴 등 입니다.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 '돈 많이 벌 수 있다' 고 속여 여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동원하였습니다. 위안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나가기도 하였으나 근무 내용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신문 구독상태나 여성의 문자해독율 등을 고려할 때 여성에게 직접 모집광고가 전달된 사례는 없었다고 보입니다.
일본군 당국이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였고, 일본군과 경찰 역시 동원 과정에 협조했습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력과 폭력을 이용하여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하기도 했습니다. 총동원체제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군의 요구가 이러한 물리적 폭력을 허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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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생활.
일분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가 살아남은 여성들은 귀국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현지에 버려지다시피 했습니다. 일본군이 패전 후 위안부를 살해하는 일도 있었으며 대부분의 업주는 피해 여성을 버려두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피해 여성들은 일본 패전 후 혼자 힘으로 살아남거나 고향에 돌아올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돌아갈 방법을 구하지 못해서',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동원된 타국에 눌러 앉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구타및 가혹행위로 인한 외상, 불임, 성병 등 일본군위안부 피해로 인한 직접적인 후유증이 오래 시간 피해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육제적 고통은 진통제 등의 약을 계속 복용하게 하여 약물 중독도 뒤따랐습니다. 또한 자신의 몸에 대한 자결권을 갖지 못했다는 모욕감, 피해 사실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받아야 할 불이익과 낙인에 대한 두려움, 삶의 패배감, 우울증및 불면증 등의 심리적 외상 등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