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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현(金義玄) 1880.03.16~1947.01.20 / 3.1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당시 장연면(長延面) 오가리(五佳里)의 서당 교사로,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인산날에 참례하기 위하여 제자인 박영래(朴泳來)와 함께 상경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를 목격하고, 김의대(金義大)와 함께 고샹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귀향 후 김일곤(金日坤).정해문(鄭海文).지민수(池敏洙).양신집(梁信集)과 함께 거사를 협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백장을 몰래 준비하였다. 거사일자를 4월 1일로 결정하고 각 동리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박영래로 하여금 준비된 태극기와 선언문을 각 동리에 전달하게 하였다. 4월 1일 오가리 소재 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흥분한 시위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파괴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11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징역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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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건(李泰建) 1885.11.01~1958.05.13 / 계몽운동 / 건국훈장 애족장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이회영(李會榮)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일제가 신민회의 무관학교(武官學校)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저지하고 신민회를 해체시킬 목적으로 소위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이란 것을 조작하여 1911년 9월 신민회 회원 800여명을 전국에서 일제히 검거할 때 이태건도 검거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언도받았다. 공소심에서 1913년 3월 20일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실질적으로 2년의 옥고를 치렀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후에도 기회 있는 대로 이태건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천의(李川義) 1911.09.09~1996.10.15 / 광복군 / 건국훈장 애족장 이천의는 1930년 1월 신간회 청년지하운동 단체인 선무부에 가입하여 선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서 1931년 2월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5년 1월 흑룡강성 북안진 전가둔에서 일본국경경비대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1934년 5월 풀려나서 흑용강성 하리치커우 한국인 농가에 은신하다가 1939년 12월 중국 호북성 대야현에 도착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4월 대야현 유격대에 입대하여 6개월간 훈련을 받았으며, 10월 대야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경비사령부 수송차량을 습격하여 폭약 및 식량을 노획하여 광복군에 보내는 일을 맡았다. 1943년 5월 남안 대불단 단자석 한국광복군 제1지대 참위로 입대하여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6년 3월 남한으로 내려와 생활하다가 1949년 한국군에 입대하여 8사단에 배속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때 영천지구에 참전하였다. 그 후 16연대 보급대대로 배속되어 보급업무를 담당하다가 1952년 7월 육군 상사로 제대하였다. 제대한 후에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 정착하여 사업을 하였다. 1977년 애국지사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