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page


286page

주용규는 본래 관북의 단천(端川)에서 살았으나 후에 제천(堤川)으로 옮겼다.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에는 불운하였으며, 일찍이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신사(辛巳)년에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이 인제(麟蹄) 설악산 중에 들어가 은거할 때 가서 뵙고 10년간을 사사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여 말하기를 "조국이 멸망하게 되고 우리 도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나는 장차 어찌하랴." 하였다.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만약 늑삭(勒削)을 당하면 다시 머리를 기르고, 저 명(明)나라 말세에 망건(網巾)을 이마에 그리고 다니듯이 하면 어떠한가" 하였다. 그러나 주용규는 "정녀(貞女)가 강포한 자에게 욕을 당하면 역시 절개를 상실한 것이 되지 않느냐." 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깨끗이 죽을 계획을 하려던 차에,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가 관동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암을 추대하여 대장의 단에 오르게 하니 공은 지팡이를 짚고 가서 참모가 되어 거사를 협조하여 주선하는 일을 맡았다. 8도에 발송한 격문이나 관헌에게 보낸 모든 공문은 다 입암(立庵)이 지은 것이었는데 보는 사람마다 강개하여 마지않았다. 군무를 장악함에 비록 사나운 장수와 교만한 졸병이라도 대우하는 것이 안팎이 없고 지성으로 효유하여 능히 충역(忠逆)과 화이(華夷)의 엄한 한계를 분간하게 하여 기운을 백 배로 돋우어 주었다. 혹시 병역이 고단하고 미약함을 우려하는 자가 있으면 말하기를 "어진 자는 대적이 없는 법인데 지금 8도가 일치단결로 분발하여 용솟음치고 있으니, 온 나라 상하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다면 적이 비록 단련된 군사와 날카로운 무기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어찌하랴, 다만 염려되는 것은 우리 진중에 장수나 졸병을 막론하고 만약 노략질하는 폐단이 있어 상하의 인심을 잃게 된다면 형세가 곤란하고 힘이 약하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혹은 병법이란 '간사한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라 하여 속임수와 간사한 짓을 행하려 하면 "우리들이 이 일을 거사한 까닭은 왕패(王 )의 계획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오. 또 군사의 직책에 있어 그 본분을 행하려는 것도 아니다. 진실로 수천 년 동안 전해 온 중화의 명맥이 이 한 모퉁이 땅에 보전되었던 것마저 아울러 끊어지게 되니, 선비로서 선왕의 도를 지키는 자라면 어찌 차마 아무런 소리도 없이 보고만 있겠는가. 장차 대의를 천하 만세에 펴자는 것이다. 성패와 이해를 논할 바 아닌즉 다른 병가(兵家)와는 너무도 같지 않다.
286page

…만약 하느님이 재앙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금수(禽獸)의 운이 더욱 성하여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부딪친다면, 뜻을 같이하고 의리를 같이 한 사람들은 다만 죽을 사(死)자를 쓴 부적을 지니고 도와 더불어 존망을 같이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가령 십적(十賊)과 상통하여 서서히 왜놈을 치기로 하자면, 반드시 성사될 것을 명확히 안다고 하더라도 의리상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성패를 예측하지 못하는 이 마당에 어찌 대의에 오점을 찍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의 이상의 견해는 초기 의병장 내지 위정척사가(衛正斥邪家) 사상의 대표적, 전형적 견해이다. 의진이 충주(忠州)에 입성하자, 다음날부터 적의 집중 공격이 심해져 갔다. 이에 이춘영(李春永)이 군사를 이끌고 수안보에 있는 적의 병참을 공격하던 중 장렬히 전사하였다. 곧이어 적의 병력이 보다 증강되자, 적은 충주성을 사방으로 포위하여 포탄과 탄알이 비오듯하고 성중에는 죽고 상하는 자가 서로 잇대어 온 진중의 상하가 다 넋이 놀라고 우왕좌왕 할 때에 주용규는 군중을 향하여 "우리 도의 보존되고 없어지는 것과 국가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 한 번의 거사에 있는데, 만약 이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군사의 기운이 상실된다면 들이닥치는 강적들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드디어 몸소 창을 들고 남문 노상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와 참좌(參佐)들이 일제히 분기하여 적과 접전하였는데 한참 싸움이 무르익을 무렵 유탄이 몸에 적중하여 순국하였다. 전투 중에도 의암이 손수 그를 염(殮)하고 입관(入棺)하여 시신을 본가로 보내었다. 그 아들 용구(容九)는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상복을 벗고 의거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득병하여 병사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