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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천품이 총명근검하셨다. 소년기에 험세를 체험하며 부귀빈천에 대한 각성을 각골명심하시고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로 이주한 후 16세에 득배하고 소작농과 소매상으로 동시출발하여 우여곡절끝에 대성하니 부봉거상으로 명성이 진동하였다. 비상한 노력으로 농지개량 제방축조 저수지신설등 수리시설과 조림사업으로 구 시대 농업을 개혁하신 선각자요 상인으로도 수십리를 행보로 혹은 려마로 춘풍추우 불철주야 신고하기 20여년 축재하여 39세에 전의면 동교리로 이주하고 제재소 정미소 창고업등을 운영하며 현미업을 위주로 인천등지로 판매하며 도정용 조곡수집을 위하여 전의 인근 천안 공주 조치원 청주 일대 대소지주들과 거래가 왕성하였고 전매사업으로 식암 비료등을 배급판매하며 일제 미곡통제시까지 20년간 인천 미두취인소와 거래하여 신시대 경제계 최고의 희비를 경험하시며 전성기를 이루셨다. 1950년 공의 회갑연 직후 6.25전쟁이 돌발하여 가옥및 사업장이 전소되니 전의일경 최대의 피해를 당했으나 공은 강인한 의지로 전시에도 가옥을 복원하시니 세인도 감탄하였다. 평생을 농상으로 동분서주하시다 1965년 을사 6월 12일 졸하시니 수 76이요 원 묘는 전의면 신방리이다. 공의 유훈에 인간사 제일은 숭조요 차는 우애 궁리 차는 근검 차가 인내라 하셨으니 자손들은 차를 가훈으로 정하고 공의 유지를 받들것이다. 배위 경주이씨 명은 례요 1894년 갑오 8월 15일 휘 재기의 장녀로 충남 대흥에서 출생하시니 성품이 온순자애 다정다감하시였다. 12세에 공과 혼인하고 인내와 정성으로 내조하여 성가하셨고 6대 종부로서 봉제사 접빈객에 극진하시였다. 생 13남매 하시나 2남 3녀를 육성하시고 자녀교육에 특별하시여 장남 인덕은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부 졸업후 이화여전 출신 정경례를 취하여 생 4남하니 손은 근하 영하 성하 영하 증손 규병 규석 규빈 현손은 준상이다. 차남 인순은 고려대학교 졸업후 이화여전출신 최활란을 취하여 생 2남하니 손 용하 진하 증손 규범 규엽이다 장녀 정녀는 풍천인 임명준에 차녀 남수는 사범학교 졸업후 농림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