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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한글] 삼면원혼제단의 내력비 [영문] 없음 <우측면> [한글] 이 비는 남제주군(군수 강기권)의 지원으로 건립하여 유족을 대표하여 그 고마움을 표한다 유족회장 고륭길 [영문] 없음 <뒷면> [한글] 서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으로 우리나라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때 정부(대통령 이승만)에서는 예비검속령을 발령하여 무고한 양민을 구속학살했다. 제주에서도 각경찰서별로 무고한 양민을 구속하였고 이구속자들을 재판판결도없이 공산주의자취급 제주주둔해병대에 인계학살했다.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다. 제주도에는 제주, 서귀, 모슬포, 성산포 등 4개소에 경찰서가 있었고 서귀경찰서의 관할은 남제주군 중문면, 서귀면, 남원연 등 3개면이었다. 서귀경찰서에서도 이3개면의 무고한 양민 200여명을 당시 중문면서귀리 587번지 오일시장내 옛 절간고구마 창고에 구금했다가 그해 7월29일(음력 6월 15일)과 8월10일(음력 6월27일) 두차례 제주주둔해병대에 인계 바다에서 학살수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경찰에서 예비검속자명부를 공개하지 아니하여 그 수를 알수없다. 본증증장단(증장 이방춘)이 당시 당시 모슬포주소를 알려줄것을 요구하였으나 자기는 모르는일이라는 답변이고 또한 해병본대정보과장이었던 고광수는 이 학살사건에 직접관여한것으로 심증이가나 역시 모른다는것이다. 당시 많은 시신이 일본국 대마도에 표류하여 갔다는 소문이 있어 2003년 10월 1일 제주도 4·3유족회에서 대마도 현지에서 위령제봉행시 본증고문김기석씨가 동행 현지에서 탐문한 바 당시 대마도 신문기자 아비유번장씨의 증언인즉 한국 625전쟁때 4·5명씩 사슬에 손이묶인 시신이 상당수 인양 화장하여 태평사경내에 납골하였으며 몇구의 시신은 서산사 뒷산에 매장했다는데 지금은 죽림이 우거져 그매장장소를 찾을수 없을것같다. 이 시신들이 제주바다에서 표류하여왔음을 입증할수있는 자료는 찾을수 없었다. 분명 여름철 조류여서 제주바다에서 흘라간 시신임이 틀림이없을것으로 심증이되나 입증하지 못하여 유해를 모셔오지 못하고있다. 이시신이 제주인 유해임을 입증할수있는 자료수집에 노력할 것이다. 입은있어도 말못하든 세월 50년이 지난 2001년 7월24일(음력 6월15일) 서귀포 휴양림 거린사슴에서 삼면의 유족들은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봉행했다. 이를 계기로 그해8월에 삼면유족회를 결성(회장이방춘) 매년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기로 하고 2002년 3월부터 제주도 서귀포시 남제주군의 지원으로 서귀포시 하원동 762번지1의 528평 부지를 매입 제단조성사업을 시작 2004년에 완공했다. 삼면유족들은 처음끌려가 학살당한 날로추측되는 음력6월15일을 추모의날로하여 매년 이날에 위령제를 봉행한다. 위령비에 학살당한 80함자가 새겨져있다. 그수가 200위가 넘을것으로 추측되나 유족들을 찾지 못하여 모두를 기록하지 못한 한을 금할수 없다. 서기2002년 12월2일 삼면유족회 [영문]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