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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리는 옛날 마을 입구에 서낭나무와 다리가 있어 귀신교(貴神橋) 또는 지렁이들(蚯蚓坪,구인평)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구인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세종때의 과학자이며 무신이었던 불곡(佛谷) 또는 백곡(栢谷) 이천선생의 후손인 이성만, 이은만 형제가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구인리는 예안이씨(禮安李氏)의 집성촌이 되었는데, 이 마을에 사는 이성만, 이은만 형제는 그들의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다는 소문이 널리 펴져 당시 보은 현감으로 있었던 이번(李蕃)이 영의정으로 있던 그의 아우 이여(李畬)와 함께 이 마을에 들러 두 형제의 효성과 우애를 극찬하고 마을 이름이 귀신다리가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영의정이 여기 「효제(孝悌)는 바로 어진 것이 그 근본이다」라고 말하며 마을 이름을 구인교(求仁橋)라고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구인리는 자연마을인 구인(구신다리, 귀인다리) 방아다리, 대목이, 쇄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구인리 주민들은 마을의 무궁한 발전을 소원하여 주민들이 성의를 모아 마을 유래비를 건립하는 바이다. 2008년 11월 17일 구인리주민일동 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