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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만은 경남 고성공립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신문배달 등으로 고학을 하면서 경응의숙상업학교(慶應義塾商業學校) 야간부를 다니던 중 독립운동을 하던 이정현(李正鉉)을 알게 되었다. 이때 이정현은 이상만에게 한국의 역사, 일제의 강제병탄 전말, 한국민족의 우수성, 한국통치의 문제 등을 말하면서 우리 민족이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일본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이상만은 그의 의견에 찬성하고 독립운동의 동지가 되기로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협력하여 김상오(金尙伍), 정인달(鄭仁達), 박삼룡(朴三龍), 이창순(李昌淳)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으며, 이들과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1940년 2월 14일 이상만은 이정현을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동맹회(同盟會)’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였다. 동맹회는 일본인들이 모든 방면에서 한국인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 내선일체(內鮮一體) 등은 우리민족의 고혈을 짜내는 책동이라는 것,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은 자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지원병제도를 역이용하자는 것, 일본과 독일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일본은 한글을 말살하려고 한다는 것 등을 논의하며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이같이 동맹회 활동을 하던 이상만은 1941년 9월 29일 일제에 검거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2년 3월 동경형사지방재판소(東京刑事地方裁判所)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