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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5년 3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 양상과 특징 ②’ 를 담임하던 김찬성(金燦星) 목사에게 서울에서 인쇄 된 독립선언서가 전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선언서 를 전달받은 김찬성 목사는 안주에서도 그날로 거사 를 하기로 결단하고, 아들 김화식을 비롯한 교회 간 부급 청년들을 자택에 소집하여 선언서를 등사 복제 하게 하는 등 준비를 하고, 교인들을 긴급히 동원하 였다. 이에 따라 그날 오후 5시경 서문밖에 모여든 교인들에게 김화식 등 청년들은 선언서를 나누어 주 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이들은 읍내로 진출 하여 건인리 청계리 방면에서도 모여든 군중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연설을 하였다. 이날 시위에 는 300~4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평안남도의 3·1운동은 3월 2일부 터 주변으로 확산되어 3월 2~3일 일본군이 발포하 여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중화군 시위, 3월 3~4일 헌병대의 발포로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숨지고, 40 여명이 부상을 당한 강서 사천 시위, 대동군 시위, 3 월 4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성천읍 시위, 양덕 읍 내 장날시위, 3월 6일 용강군 광양만 염전노동자 시 위, 온정리 농민시위, 평원군 순안시위, 덕천군 농민 시위, 3월 7일 농민들이 중심이 된 강동군 월탄면 시 위, 3월 6일과 10일 맹산읍 농민시위, 4월 21일 개천 읍 장날 시위 등이 잇따랐다. 평안남도의 3·1운동은 그해 5월 말까지의 통계만 도 시위회수 104회, 시위참여자 수 176,270명, 사망 자 수 1,093명, 부상자 수 2,167명, 체포자 수 6,836 명에 이른다. 평안도의 3·1운동은 고종황제 추도식과 독립선언 식을 가진 후 만세시위를 벌이는 3·1운동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또한 의주의 경우와 같이 민족대표가 직접 독립선언식을 주도하거나, 민족대표가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지역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와 천도교 가 큰 교세를 형성하고 있던 지역인만큼 3·1운동 지 도자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종교인 비율이 가장 높아 60%가 넘었다. 만세시위 참여자 수와 사망자 를 비롯한 부상자, 체포자 수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아 가장 격렬하고 적극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던 지 역임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문학석사) 및 한국학대학원(문학박사)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한신대학교 대학원(신학석사)에서 한국교회사를 전공했다. 독립기념관 자 료 과장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대표적 저서로는 『한말 일제강점기 선교사 연구』, 『식민권력과 종교』 등이 있다. 편역한 자료집으로 『신사참배문제   자료집』 전3권, 『3·1독립운동과 기독교』 전5권 등이 있다.  필자 김승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