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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4년 4월 Special Theme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움직인 지도자들’  도 양측 인사들과 만나 서로의 희생을 통한 타협을 주장했다. 1924년 4월 법무총장까지 사임하면서 홍진은 잠 시 전장(鎭江)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 생활에 들어갔 다. 그는 은거 기간 동안 지속된 갈등으로 인해 임시 정부가 쇠퇴하였음을 지적하는 「통분과 절망」을 작 성했다. 이 글을 통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하는 민 족의 대단결을 위하여 ‘희생’과 ‘복종’이 요구됨을 역 설했다. 민족대단결을 위해 중국 관내와 만주를 누비다 홍진은 1926년 7월 다시 임시정부에 돌아왔다. 국 무령제가 시행된지 1년 만이었다. 그는 국무령에 취임 하면서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꾸었다. 홍면희(洪冕熹 )에 서 홍진(洪鎭)으로 바꾸어 살아갔던 그의 삶에 새로운 이름‘홍진(洪震)’이 새겨진 때가 이때였다. 홍진은 국무령으로서 때마침 상하이에 들어와 있던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지역 을 안배한 내각을 구성하는 한 편, 정부의 조직도 새롭 게 개편하였다.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홍진은 전민족 이 단결한 ‘정당’의 조직을 주장했다. 그리고 민족유일 당운동의 적극적 참여로 이어졌다. 1926년 12월 국무 령을 사임한 홍진은 이듬해 4월 민족유일당상해촉성 회를 조직했다. 유일당운동의 바람은 중국 관내(關內)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고, 베이징(北京)을 비롯한 5개 지역의 촉성회가 연합회로 발전하기도 했다. 1942년 10월 25일 충칭(重慶) 오사야항(吳師爺巷) 1호 건물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제34차 회의  기념사진(경기도박물관 제공). 앞줄 왼쪽부터 유동열 박찬익 조성환 홍진 김구 최동오 조완구 김 원봉. 두번째줄 왼쪽 세번째부터 차리석 조소앙 방순희(유일 여성의원), 한사람 건너 김의한. 이  때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는 민족혁명당의 김원봉 등과 유자명(세번째줄 네번째) · 유림(네번째줄  가운데, 유자명 뒤) · 김성숙(세번째줄 일곱번째) · 신익희(세번째줄 우측에서 두번째) · 문일민(맨뒷 줄 왼쪽에서 두번째) 등 좌우파 · 무정부주의자 등 인사들이 참여한 일종의 ‘통합의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