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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어린 시절 자주 옮겨다니던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녔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남달리 온순하였고 자신이 맡은 책임을 다하는 성격이였다. ’62년 서울에서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다. ’68년 서울대 농대에 합 격하여 대학생활 중 이념써클‘한얼’에 가입하여 문학과, 사회사상을 체계적으 로 공부하며 많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등 사회에 대한 남다른 시각을 갖고 실천 하게 된다. ’75년 4월 서울대는 학원자율화 문제와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문제로 인해 학생총회와 시위가 벌어지고, 4월 2일에 이르러서는 박정희 정권의 온갖 죄 악이 농과대학 학생회 명의의 선언문에 낱낱이 고발되어 학내 분위기는 고양되 었다. 그러다가 4월 3일 3백여 명의 시위대열이 가두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학생 회장 황연수군과 축산과 4년 김명섭군이 연행되었다. 이에 분노한 축산과 학생 들은 연행학생 석방을 위해 학장, 총장에게 공개장을 발송하고 이것이 거부되면 4월 10일자로 단식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4월 10일이 되어 단식을 연기하고 자제할 것을 종용하여 이에 학생들은 하루를 연기하기로 결정 했다. 막상 11일이 닥쳤어도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는 학교당국의 모습 속에 일단 과대표회의를 열어 월요일까지로 연기하기로 했으나 3백여 명의 학생들은 해산 하지 않고 자유성토대회를 시작했다. 자유성토대회 3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 동지는‘양심선언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양심선언문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박수가 터져 나왔고 끝부분의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다음, 원문과는 달리‘나의 앞 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에 이르러 20cm가량의 과도를 품 안에서 끄집어내어 할복을 하였다. 평소 동지가 가깝게 지냈던 학우 너댓명이 동 지를 택시에 태우기까지“애국가를 불러달라”는 그의 요청에 따라 애국가를 불러 주었고, 택시에 올랐을 때는 이미 의식불명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원 도 립병원에서 약 1시간동안 하복부 하강정맥을 잇는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소생이 어려웠고 이튿날 아침 8시경 서울대 의대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구급차 속에 서 운명했다. 이후 ’76년 가족들은 박정희 정권의 감시를 피해 몰래 숨겨 모셔져 있던 서울 법륜사에서 유골을 찾아 벽제에 있는 현 묘지로 봉분을 마련 안장하였다. 그리고 ’80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정식 장례식을 가졌다. 김상진(당시26세) 벽제 국제공원묘지에 안장 1949년 11월 25일 서울 출생 19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 입학 1968년 6월 이념 서클‘한얼’에 가입 1971년 가을 군입대 1974년 가을학기에 4학년 1학기 복학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있었던 자유성토대회에서 양심선언문 낭독후 할복자결 4월 12일 서울 의대 이송 도중 운명 끝내살리라 |55| |5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박정희정권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