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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품이 호방하고 재기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망을 받았으나,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를 맞아 의기가 북받치어 한갓 낭인생활로 울화를 풀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불혹을 넘긴 1930년 나라를 위해 몸 바치기로 결심하고, 동지 유쾌동(柳快東)과 함께 「국치를 잊지 말고 독립운동에 투쟁하자」라는 격문을 대구 시내 일원에 부착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 역 8개월의 형을 치르게 된다. 출옥 후에도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향리의 주민 뿐 아니라 일가친척들조차 선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원했지만 오로지 그의 일념은 조국의 독립에 뜻을 두었기에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어렵고 힘든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옥고에서 얻은 고문 후유증으로 1940년 8월 13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대구에서 서거하셨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8월 15일 제 58회 광복절을 맞아 선생에게 대통령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 고장은 선생이 태어난 터전이요, 조국광복을 위해 불타는 정성을 가꾸신 곳이다. 선생의 드리우신 그 높은 정신을 천추에 전하고자 뜻있는 분들이 성력을 모아 선생을 기념하는 비를 세운다. 2009년 12월 일 하청면지 편찬위원회 위원장 활석(活石) 김백훈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