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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봄에 홍능국장후 팔도국민이 분기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니 이때 의사께서 함안의 맹주로 의기를 선봉에 들고 장날을 택하여 봉기하니 3월 19일이었다. 독립을 절규하는 싱위군중이 수천에 이르고 적수공권으로 총검앞에 항거하며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분기충천하니 왜졸의 만행은 유혈로 유산하고 공은 체포되었다. 그 혹독한 고문에도 사기는 엄려했고 운동을 추도한 책임은 나다 라고 호통하셨고 마산옥에 수감되어서는 심문하는 왜관앞에 탁자를 던지며 ○적불굴 하셨다. 1심에서 3년형을 대구복심법원에서는 7년반의 징역을 언도받고 신유(1921)년 8월에 마산감옥으로 옮겨졌다. 아! 의사의 옥중위가는 옛 송나라 충신 문천상의 정기가와 비교되니 이 노래는 나라망한 백성으로 하여금 뒷날에 신자된 사람들을 감발고무한 글이 아니던가. 익년(1922) 12월 23일에 장독의 고초를 견디지 못 하시고 구국광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마산옥중에서 65세를 일기로 순국하셧으니 비통할 일이다. 의사의 지극일념은 오직 나라 있음만 알고 자신이 있음은 알지 못하셨던가 오로지 구권회복만을 도모하여 초지를 불개하고 사생취의하셨으니 사이불사의 영생이 아니신가. 부음을 들은 소노남녀 붕루를 흘렷고 마산시민이 치장코저 하였으나 적의 제지를 당하였고 대산면 옥열리 석림산 임좌원에 반친하니 만사와 뇌문으로 내곡한 사람이 많았고 교남사민은 거금하여 영장입비하고 "안의사지묘"라 새겼고 유림향약소의 포장문에는 높은 절개 이미 산하를 진동했고 인구에 외자되어 내세에 전한다 하였다. 배는 일양박씨 도관의 녀인ㄷ 공전5년에 졸하고 묘는 합폄이다. 일남이 있으니 승문이요 손은 양근이고 증손은 희주와 희상과 희원이다. 의사의 항서등 유문이 많았는데 왜정의 탄압으로 사실되었고 공의 제의호씨가 억울함을 머금고 약간의 시문과 자위가및 만사 제문등을 합쳐 두 권에 엮어 "우봉실기"라 하였더니 근세에 증손 희주가 증보중간하였으며 1963년에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고 전국민족대표 48인중 한 분으로 서대문독립운동기념관 순국열사 봉안소에 타령하고 함안충의공원에 봉안하여 그 충혼을 추앙한다. 아! 성하도다. 자고로 함안은 충의의 고장이요 유수의 향인데 안공께서 또한 불우한 시대에 정출하여 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