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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후 전국유림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는 해동청풍(海東淸風) 넉자 뿐이었다.
동방의 백이,숙제라는 뜻이나 일제는 그것을 트집잡지 못해 그대로 두었다가 1937년 여름에 그 비를 깨버리겠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의 부인 박씨는 1937년 6월 4일 비석 뒤곁 뽕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그럼에도 일본경찰은 기어이 해동청풍비를 깨어 땅에 묻어 버렸다.
광복 후인 1946년 김구와 김창숙 등이 그 부서진 비를 찾아 모아 쇳조각으로 이어 복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