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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을 일으켜서 만주 전성을 점령하고 이 교육기관마져 폐쇄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구국 항일독립의식을 양친으로부터 감화받은 선생은 그 유지를 받들어 1932년 5월 17세때 동창생 2명을 규합하여 항일구국전선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길림성 동북 항일연합군 제24여단에 입단하여 이사성장의 휘하인 양상신의 독립단 무술대에 배속되어 종군하였으며 동년 9월 일군의 공격으로 후퇴 철수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선생은 선봉대가 되어 백병전으로 적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철수진로를 성공적으로 개척하였다. 그러나 왜군 대부대의 끈질긴 추격으로 1932년 12월 소련으로 월경하여 시베리아의 긴 철도를 따라 장도행군하여 이쿠츠크에 도착 3개월간 체류 중 흑룡강성 철혈구국군 마점산 부대와 독립단 무술부대 참모장 이범석 장군과 합류 과정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중한 지사의 요청에 호응하여 선생과 부대원이 함께 광복군으로 활약하는 동기가 되었다. 1933년 4월 다시 월경하여 중국 서북 신강성에 도착 동년 5월 부대를 재편하여 신강 변방군으로 호칭하였다. 동년 8월 회교족 마중영 반란군이 폭동을 일으켜 후방 신강성 적화시를 침공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천산작전에 참여하여 3개월간 악전고투 끝에 격퇴시켰다. 1937년 5월 신강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포병과 특수교육을 받고 교관으로 활동 중 1941년 3월 광복군으로 전적되어 동년 6월 후방소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2개월간 출동 아얼태산 토벌작전 끝에 후방을 평정시켜 성장으로부터 은질장장이 수여되었고 1943년 11월 보안사령부로부터 파견 근무 중 정보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적군 밀정을 검거 심문 이 지역 독산 자유전의 폭파를 사전 예방함으로 광복군의 활약을 중국 정부는 드높게 평가하였다. 광복 직후 서안 사곡의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 귀대한 선생은 그해 12월에 노태준 대장의 지시를 받아 귀국 선발대의 인솔 책임자가 되어 익년 4월 모두를 무사히 서울에 도착시켰다. 1948년 33세때 대한민국 육군 사관학교 제7기 특별후보생으로 입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진군하여 큰 공훈을 세웠고 12년간 육군으로 활약하다가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