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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선생 추모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50-1-15 / ○관리자: 신평송씨 종친회장 / ○소재지: 담양읍 만성리 167번지(관어공원내) ○건립취지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1890~1945) 선생은 우리 군의 금성면 대곡리에서 출생했다. 인근에 고비산이 있어 그의 아호도 향리의 지명을 따라 작명되었다. 그는 의병대장 기삼연(奇參衍) 등에게서 한학을, 창평읍 영학숙(英學塾)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메이지(明治)대를 수학한 후 중앙학교장과 동아일보사장 그리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 하면서 독립운동가, 교육실천가, 언론출판인, 정치가로 우리 근현대사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겼다. 고하 선생은 생애초반부터 3·1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이 운동의 실질적 주도자였지만 48인의 한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옥고를 겪었다. 그는 문화 계몽을 통해서도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중앙학교에서 조국의 역사를 강의하면서 삼성사(三聖祠)운동 등을 전개 하였다. 동아일보사장이 된 후에도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단군 및 이충무공 등 유적보존운동, 브나로드운동, 문맹타파와 한글보급운동, 여성과 어린이 지위향상 등 민중교육 및 계몽운동을 끊임없이 펼치면서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등불 역할을 하였다. 1931년 만주 만보산(萬寶山) 일대에서 발생한 조선과 중국 농민들간의 분쟁이 일제의 양국이간책임을 밝혀 한중우호를 유지한 사건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은 청사에 남을 투쟁이었다. 그는 일제의 패망에 즈음하여 해방 직전에는 정권인수제의를 거부했고, 광복 후에는 여러 정파를 통합하여 결성된 한국민주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해방정국의 최대정당의 당수와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으로서 신탁통치 이견 등에 따른 민족분열방지와 민주건국에 진력하다가 그해 말 홀연히 첫 암살희생자가 되고 만다. 고하 선생의 민족(民族), 민주(民主), 민생(民生), 민문(民文)의 사민주의(四民主義)로 일관된 일생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우리 군에 탄생 백주년 추모비가 설립되어 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우뚝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