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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익 선생은 보훈처 공훈록에서 찾을 수 없다. '포항의 독립운동사'에서 정치익 선생의 사적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산남의진의 장기사람 정치익 장기의진과 산남의진이 서로 유대를 갖고 연합전선을 구사했다는 것은 장기출신으로 산남 의진의 구성원이 된 정치익공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 명백해 진다. 산남의진을 조직하면서 정용기는 친척들인 영일 정씨들을 핵심요원으로 다수 참가시켰다. 배용일 교수께서는 그의 논문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정환직․환봉 형제, 정용기․옥기 형제, 정환집(정환직의 재종제), 정순기(정환직의 종질), 정치훈(정용기의 종제), 이능추(정용기의 외숙), 정석기(정용기의 3종제), 정치화(정환직의 4종제), 정진욱(정용기의 4종제), 정사홍, 정천여 등 얼핏 잡아 20여명이 넘는다고 했다. 이 친척들 중 흥해 흥안리에서 세거해 온 정순기는 산남의진 활동의 전 기간동안 실질적인 참모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제 3대 의병대장에 흥해 사람 최세윤을 추대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장기지역에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배용일 교수님이 이제까지 밝힌 총 349명의 산남의진 참여의병 명단(포항시사 p383-385에 게재)에 들어있는 정치익(鄭致翼)이란 사람이 바로 그 다. 1851년 포항 장기면 수성리에서 태어난 그는 2대 의병대장 정환직과는 14촌 집안간이다. 젊어서는 영천 자양에 있는 강호정(江湖亭)에서 수학했다고 하는데, 영천 자양면 검단리, 지금의 충효동은 정환직․정용기 부자가 태어나 자란 곳이어서, 어려서부터 그들과 수학하며 친분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정환직은 한때 황해도 지방 동학군 토평의 토포사(討捕使)로 일한 적이 있다. 이에 영향을 입은 정치익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의 휘하에 용양 위부호군으로서 종군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그 공을 인정하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동학당의 난이 평정된 후 잔당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서 소동 을 계속 일으키자 이번에는 의병을 이끌고 토벌에 나서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아 아들 용기와 함께 흥해, 청하 등지에서 의병을 봉기시키자 이에 영향을 입은 정치익도 조정에 상소를 올려 요로 대신을 역적이라며 죄상을 들추어 책망했다. 정환직 부자가 선전문과 통유문을 반포하여 의병을 모으자 정치익공도 당시 장기면 죽정리 에 있던 장헌문의 인물됨을 알고 같이 시사를 논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질 것을 결 의하였다. 장헌문이 김재홍 김복선등 300여 동지들을 규합, 대장으로 추대되자 그는 가산을 털어 군기와 군보포를 마련하고, 각 도․군의 의병진과 연락하는 밀사 역할을 맡았다. 산남 의진이 경상도 각 지역에 진후지원의병모집, 왜병 정세파악 및 진중 정보 연락, 군수물자 조 달을 위한 지역 책임자를 배정 할 때, 그는 공식적으로 장기지역의 활동책으로 선정된 김인 호 박경화와는 달리 산남의진과 장기의진 사이의 밀사역할을 비밀리에 수행했던 것이다. 출처 : 다음 블로그 장기사람 장기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