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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철은 충청북도 단양(丹陽) 출신이다. 1907년 8월 1일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일찍이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낸바 있던 김규철은 단양을 근거지로 삼아 이명상(李明相)과 더불어 의거를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처음에는 의진이 5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이윽고 수천 명을 소모할 수 있었다. 그는 몸 움직임이 날렵하여 세칭 비장(飛將)이라 불렸다. 대체로 단양 청풍(淸風) 충주(忠州)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9월 죽령(竹嶺) 지역에서 4백여 명을 인솔하고 적과 전투를 전개하여 5차례의 전투를 승전(勝戰)으로 이끌었고 단 한 번 패전하였을 뿐으로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후 왜경(倭警)에게 체포당하여 대구감방에서 수감되었다가 요행히 탈출할 수 있었다. 1909년 고종(高宗)이 원세개(袁世凱)에게 보내는 청병서(請兵書)를 가지고 가다가 인천(仁川)에서 다시 체포당하였다. 이 일로 김규철은 6개월형을 받았다. 1919년 이범규(李範圭) 남장희(南壯熙)와 합세하여 의친왕(義親王)을 모시고 중국으로 망명하던 도중 안동(安東)에서 발각 당하여 실패하였다. 1922년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전하기 위하여 상해(上海)로 가던 도중 인천(仁川)에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이강년의 '창의 일록'을 간행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시종 몸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