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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해에서 민족 최초의 시민혁명 동학혁명을 일으키다. 영해동학혁명은 자유 민주주의 이념과 인간 존엄성회복이라는 동학정신의 실현이자, 전국 16개 접소의 동학도, 농민, 어민, 보부상, 유생,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근대 시민혁명이다. 1871 영해동학혁명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도들은 수운의 제삿날인 1871년 4월 29일 전국의 650여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신원교조와 탐관오리 척결을 위하여 영해관아를 습격하여 영해부사를 처형하고, 교전중에 동학교도에게 포를 쏜 인물을 처벌후 곶간의 금품을 풀어 서민에게 나누어 줌. 수일 동안 인간의 존엄을 향한 민권통치에 성공한 전국 최초의 동학혁명이다. 동학의 유래 1860년(철종11) 4월에 보국안민과 광제창생 기조로 수운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그 당시 서양의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사회에 참투해오자 서학의 침투에 대항하는 한편,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등장한 동학이었다. 1863년 12월 8일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의 철권정치하에 동하교는 철저하게 탄압받고 결국 1864년 3월 10일 수운 최제우교조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중장대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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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영해 수운 최제우교조가 교세를 확장하면서 가장 활발한 지역이 영해 영덕이였기에 방문과 교류가 빈번하였고 초기 16개 접소 중 영해접소를 대접소로 칭하고 해월 최시형(2개교주)를 비롯한 동학지도자들이 영해접소와 소통하니 관의 동학탄압으로 영해접주 박하선이 사망으로 지역 동학도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는 지경이였다. 1870년 7월 진주작변에 실패한 이필제는 영해로 피신 잠복하여 수차례에 걸쳐 최시형에게 사람을 보내 면회를 요청하였지만 5번째 해월 최시형을 면담하고 교조신원과 탐관오리 척결을 위하여 최제우교조의 7주기인 3월 10일(음) 봉기를 계획하고 16개 접소에 사발통문을 하고 해월 최시형 교주의 조직 동원과 자금지원으로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난을 동학과 관계가 없는 민란으로 보아왔고, 또한 동학측에서도 최시형이 이필제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최근 동학측의 기본 사료가 발간되면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최시형 이필제등은 3월 10일(음) 교조신교의 원일을 영해봉기일로 정하고, 사건 면밀한 담당부서를 정하여 봉기를 계획한 뒤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한강 이남의 동학교도 600여명을 동원하였다. 동학도들은 천제를 지낸 뒤 최시형과 더불어 16개접소의 600여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영해부를 야승하여 군기고의 병기를 접수한 뒤 부시 이정 문죄, 처단하고 향후 활동을 논의하여 격론 끝에 후일을 도모하고 자진해산하였다. 영해동학혁명으로 90명이 죽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르면서 조선말 대원군의 철권통치와 동학탄압 정책으로 영해를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동학이 사라지는 아픔을 간직한 최초의 성공한 민주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