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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종목사 순교비문 위대하도다 이도종목사의 나라를 구하기 위한 헌신이여! 가히 백세의 목자라 할만하도다. 이 목사의 이름은 도훈이요 자는 도종으로 전주인이다. 조선 성종댜왕 삼자인 안양군 휘 향의 14대 손이요 시조로부터 42세손이다. 선친 덕연 장로와 모친 밀양박씨 열선여사의 5남3녀중 장남으로 1892년 9월 13일 제주도 애월읍 급성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많은 이들의 칭송이 이어졌다. 1908년 이기풍목사의 전도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1915년 세례를 받았고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제20회로 졸업하였다. 1927년 전북노회 김제읍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1929년 귀향후 3개교회를 개척하였으며 20여여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설교내용은 늘 그리스도인의 4대 덕목인 겸손 인내 기도 사랑이었다. 1930년 제주노회의 창립과 1938년 제주성경학원 이 개원을 주도하였다. 이 목사는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독립군자금 모금운동을 제주에서 벌여 4450명으로 부터 1만원을 모금하여 상해로 송금하였다. 이 사실이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이 목사와 순국지사 조봉호를 비롯한 6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 일로 6개월간의 모진고문을 당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보행이 불편하게되었다 또한 1938년 일제의 갖은 회유와 탄방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여 신앙적 양심을 지켰으며 제주노회의 대표로서 신사참배결의를 위한 평양총회 참석을 거부하기로 결의하여 제주노회는 총대전원이 평양총회에 불참함으로써 신사참배에 항거의 뜻을 내보였다. 이 목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그의 애국정신은 기독교 박애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나라를 빼앗기고 소망이 없던 암흑기에 독립의지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이목사의 충정과 공적을 인정하여 1999년 국가유공자증서를 추서하였다. 숭고하도다 죽기까지 교인들을 돌보시다 순교하심이여! 가히 이시대의 스데반이라 할만하도다. 이념전쟁인 4.3사건직후 1948년 6월 1일에 순회목회차 교인들을 방문하러 산길을 가시다가 무장공부에게 납치되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온갖 협박을 다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자 생매장을 시켰다 흙을 덮는 그들에게 마지막순간까지도 회개하고 예수믿기를 간곡히 부탁하며 목회자로서의 삶을 마치셨으니 안타깝도다. 이때 이목사의 나이 57세였더라. 제주출신의 천번째 목사였고 제주목회의 선구자였으며 제주의 첫순교자가 되셨다. 신실한 종의 순교의 피는 순교후 65년이 지난 지금 제주의 400여 교회와 5만 여성도의 구원사업에 밑거름이 되었으니 믿음의 선진으로서 근본이 되였다. 순교후 노회관과 대정교회등에 순교비가 세워졌고 금번 장손 동해와 유족들이 뜻을 모아 이기붕선교관 뜰에 재수립함이라. 서기 2013년 광복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