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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속에서 1948년 5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여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만들고 7월 17일 공포한다. 이 헌법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을 선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사진설명)해주대회에 참가한 김달삼. 1948년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북한 정권의 수립을 위해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날 참석자 1,002명 중에는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 대표 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조국 분단이 현실이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의 소요 사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더구나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대의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제주도는 더욱 정부의 강경 진압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습니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의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고 결국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1949년 3월까지 참혹한 집단 살상이 발생합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강제로 이동시키는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병자, 노인, 어린이 등을 포함한 이부 주민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고 소개령을 전달받지 못한 마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군인과 경찰에 의한 마을과 사람들에 대한 방화와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더구나 해안마을로 피했던 사람들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분별한 학살이 주민들을 공포로 빠트려 오히려 주민들이 도피 입산하게 만들면서 수많은 주민의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3월까지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족 살상으로 수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중산간 마을 130여곳이 초토화되면서 제주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예비검속 1949년 3월부터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을 폈고 이에 따라 많은 입산자들이 귀순했다. 이들은 젊은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 어린이, 노인들까지도 제주읍내 주정공장 등 임시수용소에 가두어졌다. 군당국은 원래의 외유 방침을 무시하고 이들을 강경처리하면서 형량도 죄명도 모른 채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1,650여명의 귀순자들을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경찰의 작전에 의해 사살되면서 사태가 마무리 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습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진설명)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온 수용자들. 귀순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제주항 부근의 주정공장. 산에서 내려온 주민들 가운데 일부 노약자들은 곧 풀려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주정공장 등 수용소에 수개월 동안 감금된 채 철저히 심문을 받았다. 그 사이 오랜 피난생활의 후유증으로 병들어 죽기도 했고 이 비참한 집중단수용소에서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다. 1959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 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서귀포, 제주항 앞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습니다. 이러한 집단학살(제노사이드)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7년 7개월 동안 고립된 섬 제주에서 당시 주민의 10분의 1이 넘는 3만 여명의 사람들이(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 추산) 희생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참혹한 비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