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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가장 격렬했던 영해3.18만세운동. 영덕군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은 '영덕 만세운동'이 아닌 당시 영덕군 영해면에서 벌어진 '영해3.18독립만세운동'으로 통한다. 영해 만세운동은 서울보다 17일 정도 늦었지만, 3천명에 가까운 시위참여로 규모도 만만치 않은 데다 특히 형해에서는 전국적으로 드문 격렬한 시위 양상이 벌어졌다. 총검으로 무장했던 주재소 일경으로는 감당이 안 돼 울진 평해와 포항의 헌병대까지 출동했고, 결국 대구의 일본 군대까지 시위해산에 동원했다. 맨손으로 일제의 총검에 저항한 시위 군중 8명이 숨지고 16명이 부상당했다. 만세 관련 체포자 도내 최다 1919년 경북 북부, 동해안을 무대로 항일의병투쟁을 벌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백두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이 1908년 겨울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계곡에서 허무하게 스러진지 11년 된 해였다. 어쩌면 영해만세의거는 다시 타오른 항일구국의 횃불이었다. 영해애향동지회에서 발간한 '영해3.18독립만세의거사'에 따르면 1919년 말 일제 조선헌병대사령부 보고서를 분석해 보니 그해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사람이 당시 강원도에 속해 있던 울진을 포함해 총2천 133명이었다. 이들 중 영덕 지역이 총489명으로 도내(대구 포함)에서 단연 최다였다. 영덕의 체포자 중에는 여성도 4명이나 있었다. 영덕의 뒤를 이어 안동이 392, 대구 297, 의성 190명 순이었다. 이처럼 영해만세의거로 대표되는 영덕의 만세운동이 그만큼 격렬했다는 반증이다. 3월 18일 경북 동해안 북부권의 최대 시장인 형해 장날 정오 사람들은 태극기를 품에 안고 가슴 뛰는 거사를 위해 모여들었다. 뜻을 함께한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 이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눴다. 오후 1시쯤 영해주재소(현재 영해파출소 자리)앞에서 만세의 첫 함성이 울려 퍼졌다.한동안 이어지던 평화로운 시위에 영해주재소 일본인 순사부장 스즈키가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하고 이어 대형 태극기를 뺏으려 달려들었다. 흥분한 만세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들이닥쳐 집기를 부수고 순사들의 모자의 대검을 빼앗았다. 또한 주재소의 무기를 모두 탈취해 파기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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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유림 "영해잘날 거사 한뜻" 영해만세운동의 단초는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김세영이 경성에서 거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발길을 돌려 영덕으로 돌아오면서부터이다. 김세영은 마침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평양신학교도 휴교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3월 12일 영덕으로 돌아온 그는 유림 측에서도 이미 전국적인 만세의거를 위해 움직인 듯하다. 고종의 국장이 선포되자 유림은 대표를 서울로 보내 봉도단(임금의 상여를 메기 위한 조직)에 참여시키고자 그 지역에서 청정한 장소를 정해 상투를 풀고 북쪽을 향해 곡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영해 지역 유림들 역사 봉도단을 통해 경성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이와 관련된 움직임을 계획하려 했다. 거리상으로 영해에서 영덕까지는 16km, 병곡과 충수에서는 20~30km이다. 유림들의 참여가 절실했던 상황이나 경북 동해안 최대인 영해장날인 점을 고려하면 영해를 거사지로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고 많은 조선 민중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