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page


270page

함안면 멱동에서 공이 태어났다. 어릴적 부터 성품이 강직하며 효성이 지극하다는 인리의 칭송을 받아왔다. 공은 평일에 부공의 조몰을 통탄하여 모부인을 섬김에 지체가 겸지하였다. 때는 구한말이라 국운이 쇠퇴하여 왜적에게 강토를 강탈당하니 공은 분함과 원통함을 참지 못하여 배일사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왔다.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 의거가 경향 각지에서 봉기되자 공은 우봉 안지호 선생의 영도하에 도남 안재영 외 수십 동지 인사를 규합하여 의거 준비를 치밀히 진행하였다. 동년 음 2월 18일 함안읍 시일을 기하여 2천여 민중이 물밀듯 모여와서 태극기를 높이 달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외치는 소리는 산천을 진동하였다. 공은 동지와 군중과 합세하여 각관공서를 점거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수감동지 구출을 감행하였는데 돌연 내습한 왜병의 무차별 발포로 인하여 무수한 희생 및 부상자를 내었다. 공은 60여 동지와 함께 현장에서 체포되어 마산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다시 대구로 투옥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공은 시종의지를 불굴하였고 출옥 후에도 향리에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공은 병중에서 을유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원통하게도 동년 9월 회일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정동소전곡 해좌이고 배 전주 이씨는 갑신생으로 후 공 4년 술자 5월 16일에 졸하였는데 묘은 공묘와 쌍봉이고 1남 2녀를 두었는데 남은 용석 손은 현제 서는 유양 천재수 밀양 박문율 손서는 강영호이다.